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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안톤 May 04. 2020

뭐? 축구선수라고??

나와 같은, 또 다른 의미의 ‘축구부’ 라 불린 사람들에게

선배 : “뭐?? 축구선수라고?”
나 :    “아.. 네”

선배 :  “아......... ”

나 :    “.............”



그렇다.
이 말은 내가 직장에 입사 후 몇 년을 들어야 했던 첫인사였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직장생활을 하는 몇 년 간 나는 이름 대신 ‘축구부’로 불렸다.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동료’가 알고 보니 정규수업도 제대로 받지 않은 운동선수 출신이었다는 것에 적잖게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나로 인해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자칫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는 만만한 일처럼 보인다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몇 년간은 내 과거를 숨기고 부끄러워야 했으며, 내 직업에게도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전반전


나는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축구선수였고, 졸업 후 고등학교 축구팀의 코치로 약 2년간 지도자 생활을 했다. 내 인생은 축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축구’ 그 자체였지만 현실은 어둡고 긴 터널이었다.
하나의 팀이 창단을 하면 하나가 해체되는 바늘구멍과도 같은 진학 경쟁에서 살아남더라도 주전 선수로 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며, 선수생활을 포기하는 즉시, '일반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가 학비를 내고 시험을 보고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다. 체육 특기생으로써의 모든 혜택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잘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장래를 생각하면 늘 불안했고 무서웠다.


그 무렵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이 생기면 책을 보고 영어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합숙소에서 선배와 동기의 눈을 피해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은 채 한 평도 되지 않는 ‘화장실’뿐이었다. 다행히 시합이 없는 비 시즌에는 그나마 오전 수업이라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야속한 선생님들은 맨 뒤에 앉아 책을 펴는 나를 보며,

'축구부는 연습하느라 피곤할 테니 숙소에 가서 쉬어라'라는 고맙지 않은 배려를 해주셨다. 숙소에 가면 이미 나와 같은 배려를 받은 부원들이 저마다 부족한 잠을 자고 있었다. 축구부 내에서 책을 보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어떤 선배는 운동이나 똑바로 하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고, 동기들은 운동 그만두고 일반학생(운동부가 아닌 학생을 그렇게 불렀다)이 되고 싶어서 그러느냐며 말리기도 했다. 책을 보는 것뿐인데 왜 그런 취급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다닌 학교만 그랬을지도 모르고, 축구부만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90년대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이 그랬을지도 모른다.


화장실 독학으로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읽게 되니 같은 반 친구가 '발음기호'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떠듬떠듬 간단한 단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무척이나 기뻤다. 한글을 처음 깨친 아이가 그러하듯, 눈에 보이는 모든 영어 단어를 읽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축구용어를 시작으로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기초가 중요했던 수학이 문제였다. 국민학교에서 배운 '산수'가 전부인 나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마지막 경기에서 상대방의 파울성 태클을 맞아 발목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지방의 전문대지만 여자축구계에서는 나름 명문이었던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나의 실력과 체격 조건으로 실업팀에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함을 느꼈고, 마침 운 좋게 졸업을 하면 체육교사를 할 수 있다는 4년제 대학을 알게 되어 편입을 결심하게 되었다. 감독님들 사이에 꽤 긍정적인 검토가 진행되던 중요한 시점이었다.

그날 내 경기를 보러 오셨던 4년제 대학의 감독님은 내가 들것에 실려 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경기장을 나가버리셨다고 한다. 후에 저 정도 부상이면 1년 이상은 재활을 해야 할 텐데 경기에 뛰지도 못하는 선수를 받아 줄 수는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코끼리 다리만큼 부어있는 발목의 통증보다 중요한 시기에 일을 망쳐버렸다며 나에게 호통을 치던 감독님의 말이 더 아팠다. 그것이 나의 선수로써 마지막 경기였으며, 감독님께 들었던 마지막 호통이었다.


부상은 생각보다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길은 생각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힘들고 막막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가족을 볼 면목이 없어 친구의 집에서 신세를 지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예식장 인형탈 알바, 이름 모를 다단계 회사, 전단지 알바 등을 하며 한 달 벌어 한 달을 버티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칠 때쯤 우연히 내 사정을 알게 된 지인의 추천으로 초등학교에서 보조코치를 하게 되었다. 이미 코치가 있었고, 그 코치가 퇴근을 하면 합숙소에서 선수와 같이 먹고 자며 저녁식사를 챙겨주고, 정시에 취침을 할 수 있도록 지도를 하거나, 학교 숙제를 도와주는 등 여러 자질구레한 일을 했다. 합숙소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대신 한 달에 용돈 정도만 받았지만 그래도 다시 축구를 할 수 있게 되어 행복했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셋이었고 학부형들은 내가 본인의 큰딸보다 어리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며, 무시하고 깔봤지만 그저 버티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중 선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가 내 사정을 듣고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코치를 구하고 있으니 거기라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어떠냐며 연락을 했다. 전국에서 소문난 악질 감독이었고, 나 또한 그 감독의 소문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식 코치로 발령받을 수 있다는 것과 고등학교 코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욕심에 그 길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듣던 대로 힘들고 고된 하루의 연속이었다. 1년 동안 3명의 코치가 짐을 싸서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학교와 계약 한 2년의 시간은 생각보다 금세 지나갔다.

몇 년 간 하위권에서 맴돌던 팀이 전국대회에서 3위를 한 뒤, 나는 미련 없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후반전


“어쩌다가 프로그래머가 된 거예요?”
그러게… 어쩌다가 비슷하지도 않은 세계로 뛰어들었을까.
시작은 사촌오빠의 권유였다. 오빠는 당시 잘 나가는 프로그래머로 돈도 제법 잘 번다고 했으며,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자유로운 직업이지만 밤새 일할 때도 많고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겐 거절할 이유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치를 그만두고 일 할 곳을 찾아다니다가 동네 피트니스 센터에 트레이너로 일자리를 구하러 갔을 때, 실장이라는 남자가 내게 준 것은 검은색 쫄쫄이 타이즈와 스포츠탑이었다. 주 2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요가 수업을 겸해야 한다는 게 채용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선수 출신이라는 생각에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하지만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새벽 일찍 나가 벼룩시장을 가져온 뒤 하루 종일 빨간 사인펜으로 동그라미와 엑스표를 치는 나날을 보냈다. '가족 같은 직원'을 구한다는 다방 종업원 모집광고를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TV나 영화에서 처럼 진한 화장을 하고 커피가 든 보자기를 들고 다니며 껌을 딱딱 씹는 '다방 아가씨'를 떠올렸다. 딱히 그 일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여기에 가면 '가족 같이' 따뜻하게 대해줄지도 모른다는 철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중 눈 딱 감고 학원에서 8개월만 배우면 저 오빠처럼 명함도 파고 돈도 잘 벌고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그래머라는 이름도 멋진,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오빠의 달콤한 제안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촌오빠는 이듬해 용접을 배워서 호주로 이민을 갔다)


자바(Java)라는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학원을 찾아 우여곡절 끝에 등록을 하고 8개월간 스스로도 대견할 만큼 열심히 배웠다.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나는 학원이 있는 양재역까지 첫차~막차를 오가며 부족한 잠은 지하철에서 보충하고 주말과 휴일은 복습을 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다. 당시 학원의 실장님이 나에게 해주신 한마디가 너무도 큰 힘이 되었다.


“머리 나쁘면 축구 못해요. 그러니까 본인이 머리 나쁘다는 생각하지 말고 다른 운동선수 출신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세요.”


막상 학원을 다니다 보니 부족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영어 공부는 걸음마 수준이었고, 기초적인 수학 개념을 잡아야 했으며, 키보드로 영문을 쳐 본 적이 없었다. 주말에는 중고 서점에서 교과서(필기 잘되어있는)를 사서 보고, 키보드를 보지 않고 영어타자를 칠 수 있도록 연습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젖동냥하듯 기초 과목에 대한 과외를 받았다.

학원만 졸업하면 취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힘들긴 하겠지만 그래도 열정을 믿어줄 회사가 단 한 군데는 있겠지 하며.. 그러나 학원을 수료한 이후 3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내 이력서를 읽어주는 곳도 면접 제의를 받은 곳도 없었다. 너무도 당연했다. 어떤 회사의 인사 담당자는 응원의 메시지를 메일로 보내기도 하였다. '당신의 도전을 응원합니다'라는 볼드체의 짧은 한 줄로..


오기가 생겨 취업 사이트에 '초대졸'과 '신입'이라는 문구만 있으면 무조건 이력서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에 50통, 많게는 100통까지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포에 위치한 작은 IT 회사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근처 지하상가에서 급하게 정장과 구두를 샀고, 화장은 친구가 해주었다. 화장을 해주던 친구가 현관에 꺼내놓은 구두를 보고 "구두 처음 신을 텐데 10cm는 너무 힘들지 않아?"라고 했다. 구두가게 사장님에게 '여자들이 많이 신는 스타일'과 '단정한 색상'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뿐이다. 구두를 시착했을 때만 해도 키가 10cm가 커진 느낌이 마냥 좋아 아무 생각 없이 구매했었다.  


면접은 사장님과 부사장님, 두 분과 진행했으며 30여분 정도 축구선수 시절에 대한 질문과 학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물어보셨다. 특별히 어려운 질문은 없었다. 면접이 끝나고 일어서는데 부사장님이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주셨다. '아,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하며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갈 수 있겠냐는 얘기를 몇 번이나 하셨다. 주유소 이름이 적힌 휴지도 손에 쥐어 주셨다. 마침 초 여름이었고, '땀을 닦으라는 뜻이구나!'라고 생각하며 휴지 손에 꼭 쥐었다.

회사 입구에서 나갈 때 면접비라는 것도 받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면접을 보게 해 주신 것도 너무 감사해서 내가 돈을 드려야 할 판에 면접비까지 주셨으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잔뜩 감동을 받고 1층에 내려온 순간, 긴장이 풀리고 그제야 뒤꿈치에 흐르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새로 산 구두에 뒤꿈치가 쓸려 피가 나고 있었나 보다. 부사장님은 면접이 끝나고 일어나서 나가던 내 뒤꿈치의 피를 보셨던 것이고, 내가 민망해할까 봐 휴지를 쥐어 주며 배웅을 해주셨던 것이다.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나 면접비 받은 것은 쓰기가 아까워 절뚝거리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내 뒤꿈치에는 그때의 상처가 남아 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합격 통보를 받았고, 그렇게 나는 나의 첫 회사가 폐업을 하게 될 때까지 10년 간 늘 감사의 마음으로 다녔다.

  

스물일곱에 IT회사에 발을 들여놓게 된 나는 어느덧 마흔이 되었다. 나름대로 로망이었던 프리랜서 생활도 잠깐 했지만, 지금은 제법 규모가 큰 회사에서 팀장을 하고 있다.

늘 까맣게 그을려 있던 얼굴은 제법 하얗게 변했고, 트레이닝복과 유니폼 대신 셔츠와 면바지에 코트를 걸친다. 직장 동료와 거래처 직원들이 휴대전화 연락처를 대부분 차지하고 있으며, SNS 친구 추천도 이제 회사나 거래처 직원이 대부분이다. 더 이상 비를 맞거나 운동장에 쌓인 눈을 치울 필요도 없으며, 선배들의 축구화를 닦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한 것은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추우면 히터를 켠다.

동료 : “김 팀장 축구선수였어??”
나 :    “왜 혼자 모르고 있다가 뒷북인 거야? ㅎㅎ”

동료 :  “부럽다.... 합숙생활 오래 했으니까 회사생활은 껌일 텐데...”

나 :    “아니야.. 내가 껌 된 것 같아. 질겅질겅 씹히는 기분이 들어 ㅜㅜ”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본인의 가능성을 100% 믿고 묵묵히 달려가는 것이 중요한 순간도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며, 술로 괴로움을 씻으려 해도 그것은 알코올이 내 뇌를 마비시키는 단 몇 시간뿐이고, 정신을 차렸을 때 다시 돌아온 현실은 또다시 괴로움과 숙취만 남을 뿐이다.

축구에서는 반드시 한번 이상의 찬스와 위기가 찾아온다. 득점 찬스를 살리지 못한 팀은 ‘역습’이라는 위기를 맞게 되고, 반대로 위기의 상황을 잘 막아내면 그것이 바로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마추어를 비롯하여 많은 프로팀의 선수들은 매일 같이 기본기 훈련을 한다. 가볍게 몸을 풀기 위함도 있지만,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인생의 2막을 시작하고 준비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믿고 그 ‘감각’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정성을 쏟길 바란다.

그 옛날 화장실에서 영어단어를 외우던 ‘축구부’처럼 말이다. 그러한 노력은 훗날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당신의 허리를 가볍게 밀어주는 손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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