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바뇨스] 세상의 끝 그네와 악마의 목구멍
11시에 민경, 나리, 현경을 만나기로 해서 바쁜 아침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살짝 배가 고프기도 하고 키토에서 하지 못한 숙제인 '엽서 보내기'를 해야겠다고 어젯밤부터 마음먹었기 때문에 9시 반쯤 숙소를 나섰다. 마을의 작은 규모 덕분에, 피친차 은행 옆의 우체국을 금방 찾아갈 수 있었고, 2달러를 내고 피친차 엽서에 주소를 적어 우편함에 넣었다.
까사 델 아르볼 -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세상의 끝 그네'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마을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20분 정도를 달려 세상의 끝 그네가 있는 언덕에 닿는다. 창문을 열자 구수한 소똥 냄새가 흘러 들어온다. 하늘은 적당히 구름으로 덮여있었다. 새벽에 잠에서 깼다가 비 내리를 거리를 보며 걱정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날씨였다.
그네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아니 그냥 작다.
어린 왕자의 행성을 덮을만한 거대한 바오밥 나무에라도 매달려있는 줄 알았지. 역시 다 사진빨이야 사진빨- 하면서도 슬금슬금 사진 찍으러 가는 게 나란 사람이다. 사람이 많을 때는 그네는 몇 번 타보지도 못하고 내려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조금 걱정했었는데 우리와 함께 버스를 타고 온 인원이 전부여서 무척 여유로웠다. 태생이 쫄보라 내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그네 줄을 꽉 붙잡고 있느라 바빴지만 딱 한 차례 용기 내어 손바닥을 쫙 펴보기도 했다. 이대로 끝까지 올라가면 천당에 닿겠는걸?
3시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창문 열고 낮잠 자기 딱 좋은 날씨라 귀차니즘이 발동하려 했지만 이대로라면 내일도 디아블로 폭포('악마의 목구멍'이라는 별칭을 가졌다)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안녕~ 하게 될 걸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선크림을 바르고 나섰다. 호기롭게 자전거를 빌려 디아블로에 가려고 했지만 작년 일본 여행을 위해 급하게 익혔던 자전거 실력이 늘었을 리가 없다. 몸보다 큰 자전거에 덜덜 떨며 올라탔다가, 고개를 가로젓는 대여점 아저씨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조용히 내려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물론 나 혼자만.
동네 아저씨들이 알려주는 대로 버스를 타긴 탔는데, 다른 도시에 갈 때 탈 법한 깔끔한 버스라 내가 제대로 탄 게 맞나 불안해졌다.
익스큐즈미 써,
아이 워너 고 투 빠일론 데 디아블로. 쏘리, 보이 아 이르 아 빠일론 데 디아블로. (Voy a ir a pailon de diablo.) 앞 뒷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어보고, 맵스미를 켜서 확인한 후에야 안심이 되었다.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가 일러주는 곳에서 내리고 보니, 표지판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길가에 사람이라곤 나 하나였다. 나 제대로 온 거 맞지? 관광객이 왜 아무도 없는 건데...?
폭포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마을 어귀에서 사람들에게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느냐 물으면 두 가지 길을 일러주는데 왼쪽으로 가면 한 시간, 오른쪽으로 가면 30분이 걸린단다. 물론 나는 오른쪽 길을 선택했다. 알고 보니 오른쪽은 폭포 위에서 보는 길, 왼쪽은 폭포 아래에서 보는 길이다. 폭포에 가까이 갈수록 엄청난 물소리가 나를 흥분에 떨게 했다. 악마가 입을 벌리고 거대한 물줄기를 내뿜는 듯 한 지옥의 입구를 바라보며 몸을 살짝 떨어주고, 혼자 구름다리를 건너며 '여기에서 죽으면 누가 알아주려나' 생각할 때 즈음, 직원인 파비앙을 만났다. 혼자였다면 찍지 못했을 멋진 사진도 남기고 폭포에 대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지만 이거슨 제가 직즙 말하기는 참 쑥쓰럽지만스도 에, 95프로 나에 대한 사심에 기반한 호의다,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게쓰요.(feat. 허구연)
그래서 빨리 자리를 피해버렸다.
마을 어귀로 나오니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라, 슬슬 현경이와 지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설마 오다가 교통사고라도 났나. 자전거 페달을 너무 열심히 밟아서 몸에 문제가 생겨서 못 오고 있는 건가. 계속 기다려보다 오지 않으면 버스를 타고 돌아가야지- 생각하며 섬돌에 앉아있었다. 왠 작은 여자애 하나가 자기 집 앞에 쭈그려 앉아있으니 호기심을 감출 수 없으셨는지 집주인 할아버지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셨다. 한국에서 몇 달을 공부해도 늘지 않던 스페인어가 확 늘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번역기와 스페인어 사전 어플을 뒤적이고, 온갖 바디랭귀지를 동원 해 내가 왜 여기에 혼자 와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한국에서의 나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지수와 현경이가 무척이나 지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6시까지 돌아오겠다며 왼쪽 길로 사라졌고, 할아버지와 나는 거진 한 시간 반을 에스파뇰로 대화한 셈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저녁이라도 먹고 가라셨지만, 버스가 끊기고 나면 돌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 짧지만 진한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버스 기사 아저씨는 익숙하다는 듯 뒷문을 열어 지수와 현경이의 자전거가 버스에 올라탈 수 있게 해 주었고, 우리는 의자에 기대어 앉아 불그스름한 초저녁의 태양과 함께 마을로 향했다.
우리는 이렇게 아쉬워할 것을 알면서도
만나고, 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