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7년 차에 동서가 생겼다

내가 이제 ‘형님’이라고?

by 달콤달달

일요일 오전 늦잠을 자고 일어나 오후에는 낮잠을 오랫동안 잤다. 아이가 산책을 가고 싶다기에 창가로 대려가 창문을 살짝만 열었다. 작은 틈으로 몰아쳐 들어오는 찬바람에 두 볼이 얼얼해진 아이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야자수 이파리가 쑥대머리 휘날리듯 정신없이 나부꼈다. 추위를 핑계로 복닥복닥한 이불을 얼굴까지 올렸더니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아이는 내가 잠든 이 방, 아빠가 잠든 저 방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혼자 놀았다. 지치지 않는 아이의 체력이 놀라우면서 잠든 엄마 아빠를 깨우지 않아 고마웠다.


토요일에 시동생 결혼식이 있었다. 남편과 연년생인 시동생에게는 우리 부부가 결혼할 당시에도 혼담이 오가는, 사귄 지 몇 해째가 되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므로 결혼이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다. 덕분에 7년이 다 되도록 맏며느리이자 외며느리로 지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 홀로 며느리로 지낸 시간은 오히려 좋았다. 동서 사이의 갈등이 고부 사이의 갈등만큼 많다는 주변 이야기 때문인지, 손아랫사람보다는 손윗사람이 대하기 편한 내 성격 때문인지 미래에 만나게 될 ‘동서’라는 존재는 막연한 불편함이었다.


연애 기간이 10년이 넘는 데다 장거리 연애였기에 시동생의 결혼은 시가에서 꽤 오랫동안 뜨거운 감자였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하늘에 뿌린 비행기 경비가 만만치 않았을 테고 연애만 하다가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되면 이미 서른 중반인 시동생이 노총각으로 남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해가 넘어갈 때마다 시부모님은 애가 끓었다. 시동생 커플의 결혼이 늦어진 나름의 이유도 미루어 짐작은 되었다. 시동생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상황에서 남동생이 군대도 다녀오고, 학교도 졸업하고 취직해서 안정적으로 어머니를 보필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자 친구가 삶의 전부를 서울에 놓아두고 제주로 터전을 옮기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동생은 옆에서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결혼식은 다소 이른 오전 10시에 시작이었다. 시동생의 경우도 코로나 추이를 지켜보며 결혼식을 미루어 왔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방역수칙이 완화되면서 결혼식이 몰리는 바람에 예식장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웨딩샵에서 혼주 메이크업을 받기로 예약한 시간이 오전 7시여서 집에서 6시 40분에 길을 나섰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된 이후로도 내내 쾌청했던 날씨였건만 눈에, 바람에 동트기 전 새벽 거리는 스산하기만 했다. 눈(비)이 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던데 이 정도 날씨면 어마어마하게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조명이 들어오는 거울 앞에 앉아있으니 임신 이후 도드라진 기미가 더욱 눈에 띄었다. 괜히 ‘임신하고 나니 기미가 짙어지네요.’ 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반면 남편은 자신을 ‘신랑님!’이라고 부르는 통에 ‘극구’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는데 무용담이라도 늘어놓는 것처럼 표정은 아주 의기양양했다.(얄미워!) 화동을 하기로 한 우리 집 꼬맹이도 정장으로 쫙 빼입고 아침잠을 설쳐가며 새벽부터 나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서는 것이 영 쑥스럽고 부끄러운지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한복까지 차려입으니 기분이 묘했다. 한복을 대여하러 갔을 때, 신랑 신부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신랑의 형수, 신부의 형님이 될 거라고 했더니 보통 형님 될 사람들은 티 나지 않게 꾸미기, 일명 '꾸안꾸'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뭐야, 신경전이야?'하고 웃음이 났는데 신부보다 튀지 않으면서도 예쁨을 포기할 수 없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가 갔다. 아이 첫돌 식사 자리 이후 샵에서 화장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아이는 이런 엄마의 모습이 꽤나 어색했는지, 화장 안 한 엄마가 '훠얼씬' 예쁘다면 집에 도착하자마자 세수를 하면 뽀뽀를 100번 해 주겠다고 했다. 화장 안 한 모습이 더 예쁘다고 하니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지만 화장 안 한 모습도 아직은 괜찮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날씨는 요지경이었지만 예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주인공 부부는 두 손을 맞잡고 동반 입장을 했고, 혼인 서약문 낭독으로 두 사람의 결혼이 공식화되었으며, 싸이의 '댓댓' 노래에 맞춰 씩씩한 화동이 웨딩반지를 전달해줌으로써 반지 교환까지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결혼식의 절정은 누나 몰래 준비한 남동생의 축사였는데 마이크를 잡는 순간부터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더니 편지를 읽어가는 내내 꺼이꺼이 울어서 참석한 내빈들에게 감동과 웃음을 동시에 안겼다. 누나가 집에서 떠나는 것도 서운할 텐데 제주도까지 가서 산다고 하니 누나를 보내는 마음도,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의 마음도 얼마나 헛헛할까? 내 결혼식 날도 떠오르고, 엄마가 생각나 금세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서는 안 되었다. 얼마 만에 돈을 주고 한 화장인데! 지워지면 아까워서 어쩌란 말이냐.


예식을 다 마친 후 아이의 소원대로 화장을 지우고(화장솜을 20장 정도 썼다), 머리는 세 번을 감고 서야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누웠다. 한복을 입느라고 3cm 정도 되는 고무신 모양의 슬리퍼를 신었던 탓인지 다리가 퉁퉁 부었다. 남동생을 결혼시키느라 이리저리 분주했던 신랑도 녹초가 되었다. 신랑 신부의 허니문은 미국 뉴욕이라고 했는데 일단 제주도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결항이 되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던 가운데 지연은 되었지만 무사히 비행기가 김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하루가 온전히 마무리된 기분이었다. 내 결혼식도 아니고, 크게 한 일도 없는데 피로가 몰려왔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지만 형님이 되는 일 또한 쉬운 일은 아니었다.


- 형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하고 동서가 말했다.

- oo 씨, 우리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잘 지내봐요. 때로는 회사 동료처럼, 때로는 의지하는 전우처럼.

동서는 스스럼없이 '형님'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아직 '동서'란 말이 입에 붙지 않아 자꾸 -씨라고 불렀다. 다음에 만나면 반가움을 얹어 '동서!'라고 불러야지.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더니 부모님이 새로 생기고, 남동생이 새로 생기고 이제는 동서까지 생겼다. 평생 남남으로 모른 채로 살았을 사람들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잘 일도 생긴다. 가족이라는 인연을 맺으며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이 생경하면서도 퍽 자연스럽다. 제주 토박이이신 시부모님께서는 어쩌다 보니 아들 둘 다 육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바람에 육지 며느리만 둘을 맞게 되셨다. 아직도 서투른 맏며느리의 제주 적응기를 지켜보셨으니 둘째 며느리는 조금 더 관대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대해주시리라. 혼자 걸어가던 며느리라는 길에 길동무가 생긴 기분이다. 말벗도 하고, 마음벗도 하면서 천천히, 오래, 같이,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 예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는 덕담과 가족이 되어 기쁘고 환영한다는 짧은 메모를 담아 시동생과 동서 각각에게 축의금을 건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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