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아님 어쩔 수 없고

by 강호연

본부장님께 오랫동안 준비했던 MOU 체결 보고를 하러

차장님과 부장님을 따라 갔다.


누가 오며, 어떤 순서로 인사하고, 어디에 앉고, 어느 쪽이 먼저 말을 꺼내는지 등등을 보고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평범했다.

그런 건 늘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아주 작은 정보 하나에 의해 갑자기 뒤집힌다.


본부장님은 보고를 다 받고는 협약기관에서 올 임원이 내 “후배”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머리를 굴릴 때 나오는 특유의 눈 굴리기를 하던 부장님은

난데없이 차장님을 꾸짖었다.


“선배가 앞에 와야지! 협약기관이 행사의 뒷순서로 되게 바꿔!”


사실 이번 MOU는 협약기관이 주도했고 규모도 컸다.

우리 쪽이 부탁을 하고 조율을 하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 조심을, 선후배라는 것 하나로 밀어붙이려는 장면이 눈앞에 놓이니까… 그게 참.


차장님의 얼굴이 잠깐 굳었지만 반대하지 못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반대하는 순간 생기는 파장이 너무 뻔해서.


그 자리에서 본부장님은 만류했지만 결국 자리로 돌아온 차장님이 협약기관에 협조를 요청했다.

통화하는 차장님의 귀는 떨어져나갈 듯 붉어져있었고 말투는 더 공손했다.

“가능하실까요” 같은 문장이 원래보다 좀 더 비굴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협약기관 담당자는 의외로 담담했다. 잠깐 웃더니, 아주 가볍게 말했다.


“No problem.”


다행이다 싶었지만 찜찜함이 남았다.

쉽게 넘어가 주는 게 고마운데, 동시에 ‘왜 이런 부탁을 우리가 해야 하지?’ 싶은 마음이 같이 올라왔다.

고마움과 민망함이 동시에 오는 감정.


행사는 그렇게 정리됐다.

순서도 바뀌고, 사진도 찍고, 보고도 끝났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도 없었다.

다들 웃었고, 서명은 잘 했고, 결과물은 남았다.


그런데 나에게 당시 MOU를 할 때 남았던 건 그 결과물이 아니었다.

‘그때 차장님이 잠깐 멈칫하던 표정’ 같은 것,

‘협약기관이 웃으며 넘어가 준 장면’ 같은 것,

그런 게 오래 남았다.


중간보고 때 차장님이 조심스럽게 말했단다.

“협약기관에 수정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부장님이 말했다.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아님 어쩔 수 없고.”


앞에서는 큰소리로 “바꿔!”였는데, 뒤에서는 “되면 하고”였다.

결국 본부장님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부장님의 쇼잉이었 것이든,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했지만 실무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안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말씀하셨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건 누가 감당했을까.

차장님의 붉어진 얼굴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체면을 세우는 일이 누군가의 곤란함 위에 올라가도 괜찮은 것일까.

그것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사회와 조직의 생리인 걸까.


그날 이후로 MOU라는 단어가 예전처럼 사업의 한 단계라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종이 위의 약속이라는 말보다, 종이 밖에서 벌어지는 작은 조정과 무게들이 먼저 생각난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대개 기록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으니까, 또 반복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어떤 자리가 잡히면 먼저 걱정부터 든다.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일이 일이 아닌 곳에서 더 힘들어질까 봐.


차장님의 붉은 얼굴을 또 지켜봐야 할까봐.

작가의 이전글[EP.11] 그럴거면 왜 들어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