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여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 소설 <테스>를 읽었다. 원제목은 <Tess of the d’Urbervilles 더버빌 가의 테스>로 테스의 비극적인 운명이 더버빌 가문과 연관이 있음을 알린다. 소설의 첫 장면은 몰락한 더버빌 귀족 가문의 집안이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테스 아버지의 부질없는 한 가닥 희망으로 시작되는데, 결국 그 희망이 테스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189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당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적 문화적인 인습에 도전을 주어 검열을 받기도 했으며 좋은 평판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21세기에 읽는 독자로서 시대적 가치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시적인지 실감하게 된다. 인습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가치관을 형성해 주지만, 그 시대를 떠나서는 무효한 기준이 될 위험이 없지 않다. 이 소설이 처음 읽혔던 당시의 인습에 비춰보면 가히 그럴만한 것이긴 하다. 혼전 강간과 사생아의 출산, 남편 외 다른 남자와의 간음, 살해라는 범죄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위대함은 테스가 보여준 삶을 대하는 그녀의 순수함과 고결한 정신이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기 때문이라고 본다. 진정한 인간의 순수성만이 한시적인 인습을 뛰어넘어 영원히 살아남는다는 고무적인 메시지를 주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스토리라인은 심플하다. 솔직히, 두 권의 방대한 이야기를 읽어 나갈 때는 그렇게 심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인공과 주변 인물 들간에 상황이 꼬여도 너무 꼬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우연처럼 일어나는 일들이 19세기 소설이라 가능할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전체 스토리는 매우 간단하다. 다 읽고 나니 그렇게 느껴진다. 결국 순결한 여인의 비극은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애처로운 한 여인의 이야기다.
순결했던 테스라는 여인이 집안 사정으로 인해 더버빌 가문에 도움을 받고자 하녀로 들어가게 되고 그 집의 바람둥이 아들 알렉 더버빌이라는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해 미혼모가 된다. 아기는 어려서 죽고, 이웃의 눈을 피해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테스는 낯선 마을로 가서 젖소 짜는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만난 목사 집안의 아들 클레어와 사랑에 빠진다. 자신의 처지로 인한 죄책감으로 클레어의 청혼을 강력히 거절하지만, 끈질긴 구혼과 그의 달콤한 사랑에 끝내는 결혼을 허락하고 만다. 결혼한 첫날 테스는 클레어의 사랑을 믿고 어렵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고백하지만, 뜻밖에 클레어는 부정한 아내 테스를 받아들일 수 없어 그녀를 떠나고 만다. 사업을 핑계로 브라질까지 간 클레어는 이국땅에서 서서히 자신의 아내 테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녀의 과거보단 그녀의 현재가 더 중요하며 그녀의 외형적 순결보단 내면적 순결이 더 신실한 사랑임을 깨닫고 테스를 다시 찾아나선다. 테스는 남편 클레어를 잃은 후 황망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세월을 보내며 남편이 자신을 용서해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린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지쳐갈 무렵 우연히 알렉 더버빌이 나타나 그녀를 또다시 유혹하고 가난했던 그녀의 약점을 기회로 삼아 그의 호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빠뜨리게 된다. 뒤늦게 테스를 찾아온 남편 클레어를 만난 그녀는 자신의 외도가 그를 두 번이나 상처받게 한 것을 깨닫고 망연자실하게 된다. 복받친 감정에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만든 원인이 된 알렉 더버빌을 결국 살해하기에 이르고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쫓아 도망친다. 테스와 클레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마지막 몇 날을 함께 보내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에 이르지만, 테스는 결국 사형수가 되어 붙잡혀 가게 되고 소설은 테스의 죽음을 알리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나는 이 소설이 주로 평가되는 기존의 사회적 인습과 편견에 과감하게 도전했다는 문제의식이나 토머스 하디가 꼬집고 싶어 했던 당시 종교적 가치관에 대해서는 여기서 다루지 않고자 한다. 같은 여성으로서 테스라는 한 여성의 삶의 굴레가 되었던 몇 가지 조건들을 좀 더 깊이 이해해보고 싶다.
첫 번째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이다. 소설 속에서 그녀의 외모는 같은 여자로서도 샘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예쁜 여자 이야기는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에도 많다. 출중한 외모는 타인과 사회로부터 호감과 호의 및 여러 선의를 제공하는 축복이지만, 그것이 때로는 치명적인 해가 되기도 한다. 소설 속 테스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외모가 이쁘지 않았더라면 테스는 처음부터 알렉 더버빌의 눈에 띄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로부터 강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은 자명하고, 클레어의 사랑도 독차지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녀의 외모가 아니었다면 알렉 더버빌이 다시 그녀를 집요하게 찾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었을 테고, 그녀의 남편 클레어도 부정한 아내에게 돌아갈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다. 외모지상주의가 그래서 판을 치고 아직도 불변한 진실로 세상 속에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외모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 앞에 우리는 차라리 머리를 조아리고 겸허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조차 든다. 그런 의미에서 못생긴 여자들이 나오는 소설도 별로 많지 않지만, 그녀들에게 기구한 운명이 있는 소설은 더더욱 읽어 본 적이 없어서, 인생은 이쁜 여자나 이쁘지 않은 여자에게나 공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표현이 여기에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난 이 소설을 읽으며 테스의 운명에 한숨이 나올 때면 그놈의 잘난 외모 때문에 모진 고생을 하나 싶은 생각 때문에 이쁜 테스의 외모가 그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여자였기 때문에 예민하게 생각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기구하게 살든 저렇게 기구하게 살든 이쁜 외모로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을 싫어할 여인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린 아직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며 19세기나 21세기나 비슷비슷한 인간의 모습으로 자연의 흐름 속에 불변하며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외모가 여인의 생애에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부러우면서도 미인박명의 운명이 마냥 부럽지만은 않은 그런 이중적 감정을 지적해 보고 싶었다.
두 번째는 그녀가 처해있던 지겨운 가난이다. 가난 때문에 가족을 대표해서 더버빌 가문에 하녀로 들어가게 되고, 가난 때문에 그녀는 몹쓸 남자 알렉 더버빌에게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게 된다.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기에 가난이란 강력한 존재이다. 외모보다 더 강압적으로 삶을 위협한다. 먹고살기 위해 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상황들. 테스의 정절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게 한 삶의 위기는 가난 외에 더한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같은 의미에서 현대의 가난 또한 여전히 그 위력이 세다. 많은 애정 관계를 무참히 끊어 놓고, 화목하던 가정을 파탄으로 몰며, 그 누구의 사랑도 가난은 단숨에 삼켜버리는 불가항력의 파괴적 힘을 가졌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핍박을 받게 되면 누구나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찾기에 급급하게 되는 안타까운 이유이다. 못난 외모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해도 가난을 초월할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될까? 가난을 모면할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쉽게 택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생존의 욕구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불가능할 것이다. 가난해지면 사람이 추해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들 가난해지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일하고 또 돈을 벌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악착같이 살아가는지 모르겠지만. 가난에 초월하는 것이 훌륭한 것인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경계가 모호하다. 아무튼 가난이 테스를 테스트한 셈이고 우리의 순결한 테스는 안타깝게도 가난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물론 그녀가 가족을 사랑해서 자신을 희생한 선택이라 가난을 미화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알렉 더버빌에게 돌아가지 않고 차라리 거리의 거지가 되었다면, 다시 그녀를 찾아온 남편과 재회하고 행복한 결말로 막을 내리지 않았을까? 가난 앞에 얼마나 담대한 자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세 번째로 그녀를 괴롭힌 건 그녀의 정절이다. 그녀의 철저한 정조 관념이 그녀를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다. 자신이 원한 것도 아니고 사고처럼 당한 강간을 통해 그녀는 완전히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른다. 소설 속에서 테스는 사랑하는 사람 클레어로부터 청혼을 받고 어머니와 상의하기 위해 편지를 주고받는 장면이 나온다. 남편에게 과거에 대해서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조언을 따르지 못하고 결국 테스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클레어에게 모두 고백하고 만다. 테스는 엄마의 외모를 닮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속물근성 내지는 삶의 처세는 전혀 닮지 못했다. 아… 이 부분을 읽으며 21세기 여성의 눈으로 테스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참 난감했다. 어디까지가 속물이고 어디까지가 정직을 벗어나지 않는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그녀의 그 정직하고 순결한 마음을 이해 못 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는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싶은 난제에 부딪힌다. 사회적 인습이 그녀의 사고관을 만들었음이 분명하지만, 그녀가 인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 영혼이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사회적 인습을 꼭 잘 받아들이면서 사는 게 현명한 삶인지 다시 묻게 되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한 번 어그러진 정절은 그녀를 여러 번 파괴한다. 첫째로는 자신의 정절을 파괴하고, 둘째는 사랑하는 남편과의 결혼을 파괴시키고, 셋째는 그 정절로 인해 돌아온 남편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더러운 인간 알렉 더버빌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서 한 번 더 자신을 파괴한다. 결국 그 정절에 관한 노이로제는 그녀를 살해자로 만들어 버리고, 자신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까지 가게 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일까? 정절을 사랑했던 것만큼이나 테스가 자기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다면 그까짓 정절을 기꺼이 버리고, 부당한 처우를 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을 키우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매우 현실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세상의 인습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미모와 가난과 정절 의식으로 사방에서 공격을 받은 우리의 주인공 테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여성으로서도 사랑스럽고 자랑스럽기까지 한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미모를 목적 달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고자 했던 야비한 인간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정직을 맞바꾸지 않았으며, 가난하고 불행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힘과 노동으로 세파를 헤쳐나가려고 끊임없이 발버둥 쳤다는 것과 자신이 정말 사랑한 남자를 위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은 그녀의 용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이 소설을 읽으며 좋게 생각한 부분이 있는데 비극적 결말이지만 각각의 주인공들이 모두 긍정적으로 성장했다는 점이었다. 역시 삶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테스는 기구한 삶을 살아가야 했지만, 인습 앞에 당당히 맞선 여인으로 초연하게 성장했고, 클레어는 자가당착적인 삶을 살다가 드디어 외형보단 내면의 순결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포용하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심지어 알렉 더버빌도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접고 종교에 입성해 철저히 회개한 삶을 산다. 더버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심지어 종교를 뛰어넘어 다른 세계까지 섭렵한 인간으로 나름 (!) 성장한다. 알렉 더버빌의 경우, 비록 토머스 하디의 반종교적인 인간을 보여주려는 짙은 의도가 보이는 부분이긴 하지만, 개연성이 전혀 없지 않은 변화라는 점에서 인간의 끊임없는 성장에 주목하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적어도 이 작품의 모든 등장인물은 자신의 삶 속에서 긍정적인 성장을 이룩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우리의 삶도 소설의 결말처럼 분명히 다가올 종국을 향해 한걸음씩 걸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의 성장이 어디쯤 멈춰 있는지 점검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