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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Jan 03. 2019

#50. <거꾸로 쓰는 육아일기>

이어 피어싱과 문신

새해에 아들을 데리고 메이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오늘은 내 생일. 아들에게 치사하지만 선물을 받아낸다. 아들아, 일 년에 딱 이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잊어서 안 되는 날이 있단다. 하루는 엄마 생일이고 다른 하루는 Mother’s Day라며 올해도 여전히 아들의 뇌를 세뇌시킨다. 남편이 옆에서 먹히지도 않을 말을 왜 입만 아프게 하느냐는 표정을 짓길래, 그에게도 일침을 놓았다. 아들은 일 년에 이틀뿐이지만, 남편인 당신은 5일이야. 내 생일, 발렌타인즈 데이, 마더스 데이, 결혼기념일 그리고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 생일이라 양보를 해 줄까 하다가 홧김에 5일에 포함시켰다.


아들에게 무슨 선물을 받을까 고민하다가, 엊그제 아들 녀석의 귓불에 치렁거리던 새로 산 귀걸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래, 올해부터 나도 귀걸이란 걸 좀 하고 다녀야겠다. 마음을 먹고 나니, 새해 첫날이 생일인 까닭에 이 나이에 하는 새해 결심치고는 무척 유치한 것이 되고 말았다. 


지금은 오래전에 뚫었던 피어싱이 막혀버렸지만, 대학교 때 우리 과에서 아마도 나랑 내 단짝 친구가 가장 먼저 귀를 뚫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때는 겁 없이 귀를 잘도 뚫었는데, 다시 귀를 뚫으려고 하니 전에 없이 겁이 난다. 나이가 들면 엄살은 줄어들고 대신 아줌마 담력이 늘 줄로 알았는데, 이상하게 난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이제껏 귀걸이를 하고 싶어도 귀 뚫을 자신이 없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최근에 산부인과에 다녀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간만에 고통스러운 진료를 받고 나니 내가 이래 봬도 애 둘을 낳은 전력이 있는데 싶어 이 정도 아픔은 참아야지 하면서 견뎌냈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최근 경험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나 보다. 이젠 귀도 겁 없이 뚫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엄살을 핀다. 너무 아프면 어떡하지? 넌 귀 뚫는 거 아프지 않았어? 왼쪽 오른쪽 귀를 합해 도합 다섯 군데는 뚫은 것 같은 아들은 내 엄살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다가, 귀걸이 값을 지불하게 했더니 냉소적인 말투로 ‘어차피 엄마 돈이야’라며 참고 있던 짜증을 입 밖으로 드러낸다. 은행에 입금된 용돈으로 내 선물값을 지불한다는 말이다. 친지에게 받은 그 많은 현금은 쓰지 않고 차곡차고 모아두면서 녀석은 자기 돈을 쓰지 않고 내가 매달 넣어주는 용돈에서 치사하게 내 생일 선물을 산다. “야, 너 왜 현금 안 갖고 왔어?” 하고 반박해 보지만, 아들은 이미 관심 밖이다. 생일날 내 기분을 나 스스로 잡치고 싶지 않아서, 아들에게 “아니야, 네 카드로 네 비밀번호를 눌러서 산 거니까 이건 네가 엄마에게 해 주는 선물이야” 하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갖다 붙였다. 아들이 듣거나 말거나. 그렇게 귀를 뚫었다. 아들에게 선물을 기대했던 그 허망한 마음에 더 큰 구멍이 뚫리고 말았지만. 


생일 저녁을 먹으면서 아들은 남편과 내 가슴에 더 커다란 구멍을 하나 뚫어 놓는다. 아들은 논쟁이 아니면 말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지 small 토크를 우리와 나누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갑자기 “엄마는 악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아니라고 생각해?” 하며 거대한 질문만 툭툭 던지는 식이다. Small Talk를 삼가는 아들은 식당에 가면 주로 먹는 데만 집중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밥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 어쩌다가 문신 이야기가 나왔다. 하긴 이어 피어싱에 문신처럼 잘 맞는 찰떡 궁합도 없다. 새해 벽두부터 아들 앞에서 귀를 뚫은 내가 잘못이지 누굴 탓하랴. 고등학교 때부터 문신을 하고 싶어 했던 아들 녀석이 드디어 자신은 문신할 것이라며 새해 결심을 선언했다. 하하. 모전자전인가? 엄마는 새해에 귀 뚫을 결심을 하고 아들은 같은 날 문신을 계획한다. 올 것이 또 왔구나 싶은 마음으로 아들의 마음을 회유해 보려 애써 보지만, 새해 첫날이라서 그런지 아들의 결심은 어느 날 보다도 굳었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정해졌으니, 어떤 말이든 자기는 듣지 않겠다는 태도다. 이제 스무 살을 코앞에 둔 아들이니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것도 아니다. 최근 들어 부쩍 부모의 권위를 거세시키는 말을 종종 뱉는다. 엄마의 눈을 피해서 하느냐 아니면 떳떳하게 밝힐 것이냐의 문제 아니겠냐면서 배짱까지 부린다. 아들 녀석의 의기양양함도 바로 그런 근거에 있다. 자신의 결심을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부모인 우리는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어차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부모가 말려도 기필코 하게 될 거라면서. 그래? 그렇다면 우리의 대화는 빨리 다른 방향을 찾아야 한다. 문신을 포기하게 할 수 없다면, 문신의 사이즈라도 줄여야 하는 게 나의 절박함이었으니까. 가능하면 잘 안 보이는 몸의 구석을 제안해야 한다. 문신의 색깔도 가능하면 나중에 지우기 쉬운 거로 선택하도록 권유해야 하고. 


커서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몇 번이고 했는지 모르지만, 아들은 내 말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지난 몇 년을 두고 고민해 왔다는 말로 자신이 얼마나 신중하고 사려 깊게 기다려 왔는지를 주장할 따름이다. 마음속으로 나는 포기를 했다. 문신하는 곳에 따라가서 최대한 작은 사이즈에 구석진 곳에 하는 것으로 양보를 하면서. 그리고 물었다. “문신할 때 부모 동의서 같은 거 쓰라고 안 하니?” 아들은 내가 미성년인줄 아냐며 웃기지도 않는다는 얼굴이다. 술은 21세가 돼야 허락하면서 왜 문신은 18세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술보다 더 고약한 것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들과 나는 각자 원하는 것을 하기로 결심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근데 왜 이렇게 허전한지 모르겠다. 아들은 자꾸 내 손아귀에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고 빠져나간다. 모래가 손가락 틈새를 타고 흘러나가듯이. 아무리 손가락에 힘을 주어 세게 주먹을 쥐어 보지만, 그럴수록 모래는 빠져 나가려고 한다. 


아들에게는 그런 한 해가 시작되나 보다. 아들은 어느새 20세 성년이 되었다. 나는? 내게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성년 아들을 둔 나이든 부모의 길은 이제까지 걸어왔던 길과는 좀 많이 다른 것 같다. 그 시작은 아들을 어린 내 자식으로 보던 시각에서, 하나의 개체로 보는 것을 연습하게 한다. 아들, 그새 많이 컸구나! 새해에도 쑥쑥 자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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