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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경 Jun 16. 2017

깔깔한 모래 속 깔깔한 인생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왠지 모래와 여자라는 단어에 끌렸다. 여자라는 단어에 묘한 매력이 있다. 무엇여자. 무엇이 무엇이 되었든,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여자라는 단어가 가진 변덕스러움과 잘 맞아떨어진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래와 여자라는 두 단어의 만남이 입안의 모래처럼 까끌까끌하다.


책을 재미있게 읽은 편은 아니었다. 얇은 책에 진도가 빨리 나갈 줄 알았는데, 끝내는 데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중간중간 딴짓을 하느라 책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책의 내용에 이상하게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아무튼,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며 읽은 책인데,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이유는 과연 책의 결말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모래 구덩이에 갇힌 남자 주인공이 과연 이 모래집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앞으로 소설을 쓸 때 이런 전제 하나를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를 이리 조리 유인하는 소설가로서의 계략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소득이 있다. 독자로부터 언성을 들을지언정, 끝이 궁금해서 끝까지 붙잡게 만드는 소설.


소설의 첫 도입부부터 사구로 곤충 채집을 나가는 한 남자의 행보가 특이하다. 모래 구덩이에 빠진다는 설정이 판타지 소설을 읽듯 (판타지 소설은 읽어본 게 사실 없어서 타당한 비유인지는 모르겠다) 꿈을 꾸듯 몽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런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잘 씻겨지지 않고 피부에 들러붙은 모래처럼 소설 전체에 들러붙어 있다.


남자는 모래 구덩이 속에 사는 한 여자가 있는 집에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그 후 모래집에 갇혀 온종일 모래를 파면서 언제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 절망과 좌절로 살아가는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왜 하필 모래일까 생각해 본다. 모래라는 자연이 주는 감성이 몽환적이라고 했는데, 여자 혼자 사는 집도 만만치 않게 신비적인 감흥을 자아내며 은근히 독자의 궁금증을 끈다. 여자와 남자의 만남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은밀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소설 속 여인의 비밀스러운 미소에 주인공과 독자는 이상하게 빠져든다. 그녀의 역할이 무엇일까 궁금하다. 동화 속 구렁이 각시처럼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존재에 홀리는 듯하다. 모래 구덩이에 갇힌 것도 이미 상당히 비현실적인데, 그런 집에 혼자 사는 여인은 호기심을 넘어서 신비하기까지 하다.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주인공 남자는 들어올 때처럼 이 집을 나가기가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매일 같이 모래를 파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무기력과 좌절, 그리고 공포를 경험한다.


어느 비평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연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했다. 모래 구덩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비유적으로 잘 보여준다. 매일 같이 모래를 퍼내고 삽질을 해도 다음 날 또 쌓여 드는 모래더미를 보면 삶이 이렇게 고달픈 것인가 한숨이 먼저 나온다. 열심히 일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의 생계가 지옥 같은 삶. 노력은 결코 성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저 쳇바퀴 도는 제자리걸음의 허무함만이 남을 뿐. 날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는 현대인들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 아닌가 싶다. 성공의 기회가 적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일하면 일거리가 더 늘어난다는 솔직해서 장엄한 느낌마저 드는 삶에 대한 표현이 거침없다.

“농부란 것은, 일해서 땅을 늘리면 일거리가 더 늘어나는 셈이니까….. 결국 고생에 끝이 없고, 그런 나머지 얻어지는 것은 더욱 고생이 늘어날 것이란 가능성뿐이야.”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모호해진다.

“어차피 인생이란 거 일일이 납득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만, 저 생활과 이 생활이 있는데, 저쪽이 조금 낫게 보이기도 하고… 이대로 살아간다면, 그래서 어쩔 거냐는 생각이 가장 견딜 수 없어. 어떤 생활이든 해답이야 없을 게 뻔하지만 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 많은 쪽이 왠지 좋을 듯한 기분이 들거든…”


모래를 퍼내며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체념 속에 살아가는 이 남자 주인공만 이렇게 삶을 느끼는 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에 잠겨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미래와 희망이라는 작은 끈을 붙잡고 열심히 모래를 퍼내면서 오늘 하루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지만, 그 내일이라는 날이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슴 서늘하게 서서히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들.


어느 날 쨍하고 해 뜰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며 오늘의 고통을 위로하려 하지만, 그것이 자위적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위험한 순간이 온다. 아무리 움켜쥐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모래, 모래성을 짓고 모래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겠다고 열심히 노력해 보지만, 다음 날이면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모래처럼,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모래의 성질처럼, 우리 인생도 일장춘몽과 같은 생임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 현실을 알지만, 모래를 퍼내는 삽질을 그만둘 수도 없다. 그것마저도 하지 않으면 당장 모래 더미에 갇히게 되기 때문이다. 간신히 내 힘으로 언덕 위까지 굴려 올린 바윗돌에 손을 놓는 순간 내가 쌓아 온 노력의 결과에 깔려 나 자신마저 상하게 되는 불가항력적인 운명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소설은 삶이란 살아갈 가치가 없는 비관적이고 허무한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여자’라는 타인과의 삶 속에서 주인공 남자는 서서히 살아갈 이유를 희미하게나마 찾는다. 여자를 통해 삶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배운다. 여자가 라디오를 들으며 행복과 감동의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적극적인 형태의 삶의 전환이라기보다는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취하는 지극히 수동적인 태도이긴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남자는 모래집에서 도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그 계획을 내일로 미룬다. 모래와 함께 사는 삶에 적응된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이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처연한 마음이 든다.

책을 읽고 나니 인생이 모래알처럼 까칠하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어려서는 모두 장밋빛 인생만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살면 살수록 인생이 만만치 않다. 그렇게 갈구하던 꿈도 희망도 짐보따리를 내려놓듯 차츰차츰 내려놓게 된다.


어차피 인생이 모래 상자 안에서의 놀이라면,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모래 놀이를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인생을 보내면 어떨까 싶다. 모래 놀이가 점점 시시해지면 인생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어차피 모래 상자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모래 바닥에 엉덩이를 퍼질러 앉아 한 판 꿈같은 모래성을 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하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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