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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현 Feb 19. 2016

소녀의 일기장


소녀는 늘 금빛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몸에 지니 고 다녔다. 꼭 필요한 말을 제외하고는 사람들 과의 의사소통을 거절했고, 학교 선생님들과 친구 들은 그런 그녀를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살 터 울의 남동생은 소녀를 향해 말도 못하는 벙어리라 며 놀려됐지만 그녀의 부모는 무관심했다.


그 녀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동생은 늘 소리 없이 나타나 일기장을 훔쳐 달아나곤 했지만, 소녀 는 그런 동생을 쫓지 않았다. 읽어주길 바랬다. 자신 의 비밀을 폭로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동생 은 늘, 온전하게 일기장을 돌려주었고, 그 어떠한 말도 전 해주지 않았다. 그런 동생을 소녀는 원망 했다.


같은 반 학급의 짝사랑하는 남자아이의 이름이나, 죽이 고 싶을 만큼 싫어하는 아이의 이름이 적힌 사춘기 소녀의 비밀스러운 일기장 따위가 아니었 다. 단지 새장에 갇힌 소녀의 울음 섞인 노래였고, 다리를 잃 어버린 인어의 흐느낌을 닮은 소녀의 외침 그 자체 였다.


어릴 적, 부모는 하루하루를 싸움으로 버텼다. 그릇들과 유리가 깨지며 그 조각들이 이를 들어낸 채, 그녀와 동생을 위협했고 그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비명의 메아리는 소녀의 성적표와 함께 사라졌다. 그녀는 늘 1이란 숫자를 성적표에 달고 왔고, 어느새 그녀는 부모의 희망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대는 집착으로 변모해갔고 그들은 소녀가 공부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관심은 그녀의 성적표 였다.


소녀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또래의 소녀들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엄마에게나 나던 여인의 살 내음이 그녀들에게서 풍겨왔고, 시뻘겋게 물들은 얼굴 큼이나 붉은 장미의 꽃잎들이 소녀들의 몸에서 떨어지고는 했다. 또한 교실은 늘 꿈을 향한 지저 귐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낯선 세계의 입구에 서 소녀는 처음으로 꿈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얼굴도 복숭아처럼 물 들어고, 새들의 합창에 맞춰 끊임없이 노래했다. 그리고 어느 날, 소녀에게도 갑작스럽게 변화는 찾아왔고 그 부끄러움과 은밀한 흔적의 기쁨에 그녀는 부모에게로 달려갔다.


-껍질일 뿐이다. 난리 칠 필요 없다. 여자라면 다 겪는 일이야. 공부나 해.


핏기 하나 없이 보랗게 물들어버린 여자의 입술이 높 낮이 없이 달싹거렸고. 소녀의 속옷을 벗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딸아, 남들과 같아서는 성공할 수없다. 달라 도록 노력해. 주위의 멍청한 아이들은 무시해! 넌 성공할 거야. 아니 그래야만 . 넌 우리의 희망이야. 그런 것에 한 팔지 마.


비가 오는 날이었고, 술에 취해 들어오는 남자의 손에는 작은 일기장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내미며 남자는 말했다. 앞으로 공부 외에 쓸모없는 말들은 다 여기에 적도록 해라.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소녀는 비에 젖어 빗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금색의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보며 대답했다.


ㅡ네. 엄마. 아빠.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공부보다 글 쓰는 것에 대해 관심을 더 보였다. 누구 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언제나 다름없이 자신의 일기장을 통해 그 꿈을 적어나갔다. 사각 사각- 연필의 심이 하얀 종이에서 아름다운 곡선을 내며 그 흔적을 이어갈 때마다 소녀는 황홀감에 미소 지었다. 어느새 집으로 돌아온 동생이 벙어리 라고 놀려되고 있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문밖의 현실은 거짓 같았고 종이 속의 세상만이 진실로 다가왔다. 그것만이 그녀를 자유로이 날개 했다.


학교에서 그녀를 가르치는 늙은 여자가 말했다. 꿈을 가지는 것은 큰 축복이고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아이들이 불행한 것이니 힘든 것이 있으면 자신에게 찾아오라고. 그래서 소녀는 여자에게 말했다. 자신의 꿈은 평생 글을 적어나 가는 것이라고. 세상을 물들이는 작가가 되고 싶 다고. 그 비밀의 고백 속에 늙은 여자는 웃고 있 다.


부모는 소녀의 일탈을 금방 알아차렸다. 학교로 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그녀의 날개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그녀의 꿈은 보호받지 못 했다. 일기장은 갈기갈기 찢어졌고, 그녀가 써온 모든 글들이 쓰레기통에 처박혀 불태워졌다. 불길은 그녀의 앞에서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오르며 소녀를 위협했다. 그녀의 꿈들은 검은 재가되어 허공으로 흩뿌려졌고, 별들도 숨어버린 검은 하늘의 분노에 감정은 비명을 지르며 불꽃을 토해냈다. 멍하니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소녀의 머리 위로 꿈의 조각들이 바스러지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ㅡ날아


검었게 그을려진 단어의 시체가 그녀의 눈을 사로 잡았다. 날아. 날아. 날아. 지금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쫓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상에 추락 한 조각들을 모아 아파트의 옥상에서 하늘 높이 뛰어 올렸다. 그것들은 하얀 나비가 되어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으며 날라 올랐다. 소녀는 미 다. 그토록 원하던 것이 이곳 너머에 있었다. 소녀는 두 팔을 벌려 날갯짓을 시작했다. 하얀 깃털이 그녀 의 팔에 돋는 것을 느끼며 소녀는 나비를 쫓아 옥상 에서 뛰어내렸다. 쏟아지는 별빛들 사이로 새들의 구슬픈 노랫소리가 소녀를 싣고 밤하늘을 젖히며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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