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안 인하대 교수 & 예술칼럼니스트
서울 삼청동 '선혜원(鮮慧院)'
SK그룹 창업주 故 최종건 회장 사저
시민을 위한 예술공간으로 개방
한옥 저택에서 느끼는 압도적인 아름다움
북악산 아래 자리한 삼청동(三淸洞)은 북쪽으로 향할수록 고즈넉하다. 초입이야 경복궁과 맞닿아 있어 항상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좁고 정겨운 2차선 도로를 따라 삼청공원 인근까지 가면 언제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기품 있는 동네. 삼청공원 삼거리에서 웅장한 북악산을 바라보다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거기, 선혜원(鮮慧院)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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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효안
삼청동은 조선 후기 한성부의 역사를 서술한 《한경지략(漢京識略)》에 ‘산이 맑고’(山淸), ‘물도 맑으며’(水淸), 그래서 ‘사람의 인심 또한 맑고 좋다’(人淸)는 뜻에서 삼청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한 동네에 참 걸맞다. 북악산 동남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인심 좋게 누구나 환영하기 때문이다.
선혜원은 1968년 SK그룹 창업주인 故 최종건 회장이 직접 매입해 작고 시까지 기거했던 사저(私邸)다. 최 회장 사후에는 SK그룹 연수원 등으로 쓰이다 이번에 시민들을 위한 예술공간으로 정식 개방했다. 원래 선혜원은 한옥이 아닌 양옥 대저택이었다. 일반 개방에 앞서 SKM 아키텍츠, 김봉렬 한예종 명예교수가 이끄는 ‘온지음 집공방’ 등이 협업해 3채의 한옥 저택으로 대변신을 이뤘다.
사실 이곳을 탐방하기 전에는 근현대 양옥 대저택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게 원형을 그대로 살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은 막상 선혜원을 보고 나니 사라졌다. 그만큼 새로 지은 한옥의 건축적 아름다움이 가히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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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효안
선혜원은 삼청동을 관통하는 도로인 삼청로에서 인접해 있다. 다만 높은 지대에 있다. 그래서 삼청로에서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그저 땅만 보고 걸으면, 언덕 위 위풍당당한 한옥에 <鮮慧院>이라는 한자 현판을 놓치기 쉽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채 밖에서는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곳. 그러나 선혜원은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에 먼저 향기로 자신이 얼마나 고혹적인 존재인지를 알린다. 입구에 닿기도 전에 골목에서부터 상쾌한 피톤치드 향이 진동한다. 굳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얼마나 좋은 목재로 지어진 한옥인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담 너머 요새 같은 공간을 만나기 위해선 일단 입구에서 여러 번 방향이 꺾이는 얕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아직 공간은 보이지 않지만, 정갈한 석조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서 기대감은 증폭된다. 계단 끝을 지나면 드디어 흙으로 된 땅을 밟을 수 있는데, 붉은색과 자주색이 섞인 홍자색(紅紫色) 꽃이 핀 배롱나무가 그 공간의 주인공이다. 사람을 홀리게 하는 꽃 잔치를 지나면 아담한 마당에 한옥 마루 밑으로 세우는 기둥인 누하주(樓下柱)가 굳건하게 서 있다. 이를 통해 지금 들어선 공간이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높게 지은 건물인 루(樓)의 아래임을 짐작한다.
루 아래 고요한 공간을 거닐다가 드디어 가파르게 펼쳐진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기 전에 웅장한 한옥이 계단 끝에서 마치 프레임 안에 담긴 직사각형 사진처럼 빼꼼히 보인다. 정면에 <경 흥각(京興閣)>이라는 현판이 보이게 지어진 계산된 비례가 놀랍다. 경 흥각은 이렇게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면 동시에 조금씩 자신을 드러낸다. 마침내 계단 끝에 다다르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적당한 크기의 잔디 마당이 나온다. 가파른 계단을 오른 뒤 마주하는 초록의 마당과 호방한 한옥은 참으로 아름다워서 절로 경탄이 나온다. 아래에서 위로, 작은 공간에서 큰 공간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동시에 여러 차원의 감각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단언컨대 선혜원 공간미의 백미(白眉)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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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효안
선혜원은 경 흥각, 하린당, 동여로 3개의 한옥이 디귿(ㄷ) 형태로 배치됐다. 가장 메인 한옥인 경 흥각(京興閣)은 “경사롭고 흥성하다”라는 뜻을 담았는데 SK그룹 전신인 선경(鮮京), 즉 SK그룹의 항구적 번영의 바람을 내포한다. 하린당(賀隣堂)은 “이웃을 돕는다” , 동여로(同輿樓)는 “사회와 함께 간다”라는 의미를 담았다. 한마디로 기업의 국민과 함께하는 동반 성장 의지를 총체적으로 담은 예술 영빈관(迎賓館)인 셈이다. 이 3채의 한옥은 실은 하나의 집이다. 경 흥각은 연회를 여는 메인 홀, 하린당은 아늑한 안채 또는 사랑채, 동여수는 차와 담소를 나누는 티룸(TEA RO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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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여로 / 사진. ⓒ최효안
역사와 혼이 담긴 공간을 후대에 전하는 형태는 다양하다. 건축 당시 모습을 그대로 살리는 일차적 계승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때론 새로운 공간미를 보여주는 이차적 계승이 더 나은 선택일 때도 있다. 선혜원은 후자를 택했다. 삼청동이라는 옛 정취를 간직한 고아(高雅)한 동네에, 한옥 특유의 매력을 집대성한 건축으로, 대중들에게 수준 높은 공간 체험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선혜원의 대변신은 공적 예술공간의 하나의 이정표가 될 만하다.
지난 10월 19일로 막을 내린 선혜원 그랜드 오프닝에 함께한 예술가는 김수자. 한국인 특유의 정서를 담은 개념예술로 세계적 대가 반열에 오른 김수자는 선혜원 3채의 한옥 가운데 가장 중심 건물인 경 흥각을 아예 작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대담한 시도를 보여줬다. 시원하게 쭉 뻗은 층고의 경 흥각 내부 바닥에 거울 패널을 깔았다. 1763년에 지어진 옛 파리 증권거래소 건물로 현재는 피노 미술관로 쓰이는 거대한 돔(Dome) 건물 바닥에 2024년 역시 같은 시도를 했던 김수자의 '호흡' 시리즈 선혜원 버전 (Kimsooja, To Breathe ㅡ Sunhyew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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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호흡-선혜원>, 2025 / 사진제공. 선혜원
이 '호흡' 시리즈는 관람객들에게 시공간과 감각을 뒤흔들고 요동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분명 한옥 건물에 들어왔을 뿐인데, 그곳은 몽환(夢幻)의 세계다. 거울 바닥을 거닐 때마다 내 움직임은 거울에 반사되고, 그 반사된 이미지는 공간에 너울거린다. 이쯤 되면 경 흥각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느껴지고, 나의 호흡과 공간의 호흡이 뒤섞인다. 경 흥각을 나가게 되면, 마침내 나는 경 흥각 입장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분명 무엇을 느꼈는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 호흡‘ 시리즈에서 느끼는 경지다.
공간 자체를 작품으로 만들어서, 그 안에 들어온 관람객들의 영혼까지 작품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는 김수자와 선혜원의 만남은 탁월한 전략이었고, 보기 좋게 성공했다. 빼어난 건축물 그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누리는 기회는 쉽게 만나기 힘들다. 선혜원은 그 자체의 독보적 가치를 김수자의 예술을 통해 드높였고, 김수자는 한옥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지점은 이 모든 예술적 경험이 시민들에게 공짜라는 사실이다. 선혜원은 '생생한 예술 지혜를 베푸는 공간'이란 이름에 부합하는 첫행보로, 기업의 '사회적 공헌'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최효안 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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