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를 쌓으며 깨달은 것들
지금 나는 6년 차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쌓고 있다. 그런데 10년 전만 해도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부생 때는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졸업 후에도 어디로 커리어를 쌓아갈지 우왕좌왕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지금의 커리어에 이르게 됐을까? 지금의 커리어에 이르기까지 과정과 느낀 점을 소개해 보려 한다.
나는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해 자동차 디자이너를 꿈꿨고, 그렇게 4년 동안 한길만 팠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아니,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도 차고 넘쳤다. 4년째 부단히 노력했다고 자부하지만, 실력이 크게 좋은 것도, 뚜렷한 경쟁력도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좁은 자동차 디자인 취업시장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졸업 전시를 준비하면서 진로에 대해 고민했고, 자동차 디자인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방법으로 자동차 산업의 디자이너가 될 방법을 고민했다. 우선 내가 잘하는 게 무엇일지 고민했는데, 컨셉을 세우고 스토리텔링하는 것에는 자신 있었다. 마침 자율 주행이 업계의 화두였고, 자율 주행 자동차의 사용자 경험(UX)에 대한 담론이 쏟아지던 참이었다. 그렇게 논리적인 시나리오를 만들고, 맥락에 맞는 자동차 컨셉을 개발하는 것, 즉 자동차 UX를 해보자는 생각에 도달했다. 다행히 이런 시도에 교수님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셨고, 졸업 전시에서 미래 도시 모빌리티와 인프라를 제안하게 되었다. 지금 보면 프로젝트의 완성도는 처참하지만, 적어도 남들이 하지 않은 (학생이기에 가능한) 색다른 관점을 제안했다고 자신한다.
때로는 가진 것을 과감히 내려놓을 때, 더 넓은 세계가 펼쳐진다.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된다면, 가고 싶은 방향에서 살짝만 방향을 트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내 장점을 알고, 거기에 맞춰 시도한다면 분명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은 성공했을까? 그럴 리가. 가뜩이나 작은 취업시장에 생경한 분야를, 그것도 전문성을 어설프게 갖춘 나에게 주어질 자리는 없었다. 관련 직무 채용은 자격 요건조차 갖추지 못했고, 그나마 본 인턴 면접은 회신조차 안 오며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럼에도 긍정적이었던 건, 이 실패를 통해 뭐든 도전할 배짱을 얻었단 것이다. 낙담할 시간에 뭐라도 해야 하는 간절한 시기였기에, 가리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활용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인포그래픽 수업을 들었다. 주어진 데이터를 분석해 이해를 돕는, 창의적인 시각 언어를 표현하는 수업이었다. 강사분의 포트폴리오가 흥미롭기도 했고, 당장 익숙하게 다룰 수 있는 툴이 일러스트레이터였기 때문에 듣게 되었다. (재밌게도 이 일러스트레이터 실력은 군대에서 엄청나게 노가다한 결과였다). 또 다른 하나는 UX 산학 프로젝트였는데, 한 의료기기 스타트업이 개발 중인 기기의 사용자 경험을 제안하는 작업이었다. 졸업 전시에 했던 경험을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산학 프로젝트에서는 아무래도 경험이 많은, UX를 전공하는 학생들이 더 주도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와중에 할 수 있는 걸 찾았고, 앞선 수업에서 배운 일러스트 형식의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만들기로 했다. 때마침 의료기기의 사용 방법과 특징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렇게 사용자 경험 속에 포스터를 적절히 배치하면서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이후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인턴 제안이 왔다. 회사 입장에서는 의료기기를 잘 이해하고 표현한 인포그래픽 포스터가 흥미롭게 다가온 것이었다. UX/UI 디자인 업무를 할 수 있겠단 기대로 인턴 제의를 수락했다.
내가 잡을 수 있는 기회에 거리낌 없이 도전하고, 그 경험을 서로 연결 지을 때 더 임팩트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또 다른 새로운 기회를 마련해 준다는 걸 깨달은 경험이었다.
아쉽게도 스타트업은 UX/UI를 다루기에 이른 시기였다. 하드웨어 개발이 한창이었기에 내가 원한 부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기엔 어려웠다. 결국 이번에도 할 수 있는 걸 적극적으로 해보기로 했다. 스타트업이었기에 다양한 곳에서 피칭하거나, 정부 과제를 위한 지원서를 제작해야 했다. 특히 기기에 대한 의학적 설명을 쉽게 표현할 이미지가 필요했기에, 그 소스를 성심성의껏 만들었다. 다음으로는 브랜드 디자인 자산을 개발하기로 했다. 잘 만들어진 CI가 있었지만, 그것을 활용할 디자인 자산은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구성원들과 함께 디자인 워크숍을 진행했고, 회사에 대한 내부 구성원의 이해와 가치를 기반으로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개발, 제안했다. 내부 반응은 긍정적이었고 결국 이를 활용해 학회에 설치될 부스와 홍보물까지 디자인할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래픽 디자인과 친해지는 시간이었다.
그래픽 디자인 역량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로 마음먹고, 개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하루분해도라는 프로젝트로,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오브제로 빗대고 이를 마치 분해도처럼 펼쳐 표현하는 기록 작업이었다. 여러 날을 기록해야 의미가 생기기에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나는 생활기록부에 빠짐없이 나온 단어가 성실함인 사람이었고, 무사히 일 년 동안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런 꾸준함이 인상 깊었는지 한 카페 전시 공간에서 전시 제의가 들어왔다. 그렇게 30여 개의 분해도를 전시하며 성실함이 가진 큰 힘을 느꼈고, 그래픽 디자이너로의 커리어를 준비하는데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지금의 회사에서 입사하게 되어, 6년 차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꾸준함은 단순히 오래 이어가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복리처럼 쌓이면 쌓일수록 더 큰 능력과 기회로 돌아온다. 티끌 모아 태산은 돈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시작이 막연히 망설여진다면,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쌓아보자.
이 이야기는 결국 내가 처음 원하던 커리어를 이루지 못한 이야기이다. 자동차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꿈을 접었고, 그나마 도전했던 자동차 UX도 기회를 얻지 못했다. UX/UI를 하려고 했던 시도는 결국 엉뚱하게도 그래픽 디자인으로 나를 이끌었다.
아마 많은 이의 커리어가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말자. 뜻대로 되지 않는 게 결국 커리어를 망치는 건 아니다. 할 수 있는 걸 하고, 그걸 연결 짓고, 또 꾸준히 적극적으로 해나간다면, 분명 생각지 못한 길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생각보다 나에게 잘 맞을 수도 있다. 10년 전 그래픽 디자인에 일면식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이 업에 진심인 나처럼 말이다. 어쩌면 뻔한 방법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든 이뤄낼 수 있다. 그러니 해보자, 어쩌다 보면 분명 길이 만들어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