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화와 효현 / 천수
미화는 효현이 집에 놀러 오면 같이 해보고 싶은 게 여럿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셀프 속눈썹 파마하기. 미화는 소파 한 귀퉁이에 앉았고, 효현이 미화의 무릎 앞에 등받이 쿠션을 깔고 누울 때까지 기다렸다. 효현이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 미화는 무언가 분주한 소리와 함께 속눈썹 파마약을 준비했다. 1제를 바르고 9분, 2제를 바르고 8분을 기다리면 바싹 올라간 속눈썹으로 적어도 석 달을 보낼 수 있다며 미화는 파마약 패키지에 적힌 문구를 자랑하듯 크게 읽었다. 효현은 말없이 동의했다. 숍에 가는 것보다 얼마나 가성비가 좋은가. 미화는 효현을 통해 어릴 적 친구들과 돌이나 모래나 나뭇잎으로 소꿉놀이하며 보내던 시간들로 돌아갔다.
효현과 미화는 효현이 천수네로부터 독립하면서 사이가 좋아졌다. 효현이 천수네 얹혀살 땐, 미화는 효현에게 빨래할 때 양말을 까뒤집어 놓지 말라며 잔소리했고, 효현은 발에 땀이 나서 안쪽이 빨려야 한다며 끝까지 양말을 뒤집어 세탁기에 투척했다. 모녀의 대화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자신에게만 맞는 말을 하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화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효현의 짓거리를 이해해보려고 하다가도 말 안 듣는 딸랑구를 생각하면 싫증이 났다. 뒤집어진 양말을 볼 때마다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효현 때문에 조금 서러워졌다. 효현은 늘 하던 대로 쉰내 나는 쪽으로 뒤집어 벗다가 가끔 세탁기에 양말을 넣기 직전, 미화가 하던 말이 생각나면 그제야 바로 벗었다. 효현이 미화를 신경 썼던 건 대략 10켤레 중 3켤레 꼴이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양말을 뒤집으며 '이거 뒤집는 게 어려운가' 생각했다. 효현의 양말 벗기 습관은 효현이 스무 살 때 자취를 시작하고 빨래를 개는 미화의 삶을 살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완벽하게 치유됐다. 축축한 양말 끝까지 손을 넣어 뒤집은 뒤 건조하는 일은 해야 할 가사가 많이 남은 미화에게 생각보다 작은 일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속눈썹 약제를 바르기 위해 얼굴을 거꾸로 가까이 마주한 모녀는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 시작이네.” 미화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효현을 따라 터져 버린 웃음을 참아내려 얼굴 근육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웃음을 따라 효현이 더 웃으면 속눈썹 약제가 눈에 들어갈까 봐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20분 뒤, 미화가 효현의 속눈썹에 도톰이 바른 약제와 덮어 둔 하얀 솜 같은 걸 걷어냈다. 효현은 답답했던 속눈썹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화장실로 가서 독한 약제 때문에 간질거렸던 눈두덩이를 씻어 내렸다. 미화가 읽었던 패키지 문구처럼 눈에 띄게 바싹 올라간 속눈썹이 효현은 좀 어색했다. 미화는 뿌듯하다는 듯 효현의 눈을 이리저리 여러 각도에서 쳐다봤다. 효현은 얼굴 근처에서 그러는 미화가 웃기고 귀여우면서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모녀가 속눈썹으로 희희덕거리는 동안 조용히 티비를 보던 천수는 몇 번의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지만 효현과 미화는 눈치채지 못했다. “또 뭐해여.” 모녀의 세계에 낄지 말지 눈치를 보던 천수가 용기 내어 한 마디했다. 그제야 효현과 미화는 천수가 대화에 참여하고 싶었다는 걸 눈치챘다. 거실에는 천수가 애정하는 지정석이 있다. 효현이 6년 전 자취할 때 이케아에서 4만 원 주고 샀던 1인용 등받이 흔들의자가 천수네에 들여진 순간부터 천수는 그 의자를 자신의 마음에 들였다. 의자를 흔들거리며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는 게 천수가 가장 좋아하는 힐링 타임이다. 효현에서 천수로 주인이 바뀐 의자는 천수가 시청하는 티비 프로그램이 재밌을수록 크게 흔들거린다. 천수가 <나는 자연인이다>, <더 맛있는 녀석들>, <브레인 TV 장기채널>을 볼 때 의자가 흔들리는 강도가 보통보다 세진다. 의자를 보면 천수의 기분이 보인다. 효현이 생각했을 때 천수는 산에 들어가 자급자족하는 삶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 같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내 손으로 직접 지은 집에 살며 직접 잡은 물고기를 요리해 먹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삶인가‘ 하며 효현은 천수가 아빠였던 이전의 자연인 자아를 짐작해 본다. 이때 효현이 생각한 자연인이란 사람이나 숫자나 각종 서류에게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어느 날엔 천수가 갑자기 턱수염을 길게 기르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가 미화에게 된통 잔소리 직격타를 맞은 적이 있다. 얼마 안 가, 자신의 얼굴에 길고 거문 턱수염 필터를 씌운 사진을 카톡 프사로 바꿨다가 미화에게 지저분하다며 바꾸라는 질책을 받기도 했었다. 효현은 턱수염과 자연인은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다.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책임에 대한 부담이 왜 없었을까. 딱 자기 몸 하나만 건사하는 티비 속 자연인들을 보며 천수는 어떤 해방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중년 남성들에게 그 프로그램이 사랑받는 이유가 이 때문은 아닐까 하고 효현은 어림짐작했다.
자식을 길러 낸 부모님들은 대단하다. 끝끝내 이혼하지 않은 남녀는 대단하다. 부모님을 끝까지 부양하는 자식들은 대단하다. 사랑의 힘은 대단하다. 사랑은 결정을 식은 죽 먹도록 쉽게 한다. 그러나 지치고 힘들 때 가장 먼저 사그라드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보다 인내가 더 대단한 이유이다. 결정은 쉽고, 유지하기는 무척 어렵다. 결정이 어렵다면 그건 유지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정 뒤에 따르는 인내가 두렵기 때문이다. 천수의 로망인 자연인은 막말로 자기가 죽고 싶을 때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천수의 삶에서 대부분은 그가 자연인이 아니었다. 힘들고 지쳐도 웃음으로 기꺼이 이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누군가와 자기 자신을 위해 인내했던 삶 반대편에서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59세 천수에게 로망의 대상이 되었다.
26. 1.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