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손수건
이웃에 살던 H의 엄마는 달리기가 좋다고 했다. 남편이 공무원이었는데 공무 중 부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고 했다. 그녀의 남편은 휠체어에서 항상 화난 표정이었고, 조금만 건드려도 싸울 듯 대들었다. 늘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그랬다. 버티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것이 달리기였단다. 남편이 거의 5년 동안 병원에 있었는데, 매일 병원 뒷산을 달렸다고 했다. 30대 초반, 어린 아들을 가진 여자에게 반신 마비의 남편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머물러 있자니 아득한 앞날에 접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고, 그렇다고 훌쩍 떠나버리기도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달리면서 간호하고, 재활치료를 돕고 어느 정도 치유해서 현재까지 살아내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 화를 잘 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남편이 무서워서, 싸움이 잦은 사춘기 아들로 인해 너덜거리는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달려야만 한다고 했다.
숨그네라는 제목의 책을 읽었다. 숨그네란 숨을 한 번 내 쉴 때마다 죽음과 삶 사이에서 그네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했다. 나치에 의해 파괴된 소련의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살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독일인들을 남녀 불문하고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5년 동안, 혹독한 추위 속 굶주림과 강제 노동의 더할 수 없이 슬프고 끔찍한 이야기였다.
주인공이 구걸하러 거리에 나갔던 어느 날 아들 생각이 난다며, 한 아주머니가 따뜻한 수프와 하얀 손수건을 주었다. 빵과 바꿀 수 있는 손수건이었지만 굶주림을 참으며 간직했다.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수건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작별인사가 손수건으로 모습이 바뀌었다고 여겼다. 한 장의 손수건이 자신을 보살핀다고 생각하며 고된 생활을 버텨냈다. 나는 수용소의 비참하고 참혹함을 들여다보면서 하얀 손수건이 머릿속에 꽂히고 말았다. 이웃에 살던 H의 엄마에게는 달리기가 운명의 손수건이었고, 긍정의 말 한마디였던 것 같았다.
나도 좀 어두웠던 날들이 있었다. 몇 년 전 치매 시어머니와 온종일 씨름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병명에서 풍겨 나오는 어려움 외에도 약해진 뼈에 자주 금이 갔다. 깁스도 하고 시술도 받고 해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니 심하게 짜증을 냈고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다. 당시 가슴에 뭔가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묵직하니 답답했었다. 숨그네의 주인공이나, H 엄마에 비하면 가벼운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도 참고 견딜 수 있게 할 운명의 손수건이 필요했다. H의 엄마를 떠올리며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것이 나를 달래 주었고 견디게 했다.
나도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었고 여전히 달리고 있다. 부득이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네 번, 30분 정도 달린다. 달리지 않으면 하루 할 일 중 무언가를 빼먹은 느낌이 들고 운동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달리는 동안 복잡한 심사를 좀 잊을 수 있고, 조금만 참으면 지나갈 거라며 속삭이는 듯싶었다. 눈앞에 푸른 들판이 펼쳐지기도 하며, 좋았던 날들이 떠올라 저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가슴 밑바닥에 간직한 숨그네의 손수건처럼 어깨를 두드리며 힘을 주는 듯했다.
나도 달리기에 기대어 답답한 한 구간을 무사히 지나왔다. 의학적으로도 달리기를 하면 도파민과 세로토닌이라는 행복 물질이 분비된다고 한다. 삶의 굴곡진 부분을 지나갈 때 달리기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 줄기 바람을 가르는 시원함을 기대하며 운동화와 물을 챙긴다. 마치 운명의 손수건을 곱게 접어 가지고 외출을 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