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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콩맘 Jun 01. 2021

친정아빠가 김치찌개를 끓였다

산후조리하면서 발견한 소울푸드!

2주간의 산후조리원 생활은 천국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우울했다. 무조건 쉬어야하는데 쉬는게 목표가 되어버리니 무료했던 것이다. 모유수유 할 때 빼고 마사지도 받고 조리원 교육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혹시나 뼈에 찬바람 들까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코로나 때문에 남편도 조리원에 자주 올 수 없어 마음껏 수다 떨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모유수유 때문에 아기를 낳았어도 이것저것 따져서 식단을 제한하다보니 알다가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였던 것 같다. 인류가 태어나서 누릴 수 있는 기쁨, 아무거나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없어지다니, 아기만 낳으면 뭐든 마음대로 했던 걸 할 수 있을꺼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조리원에서 나온 밥은 맛있게 먹고도  명치가 답답하고 소화가 안되는 느낌이었다. 백김치, 간장 불고기, 동그랑땡, 두부조림, 삼치구이, 파프리카볶음, 샐러드, 요거트, 증편, 치즈케이크, 두유까지... 스트레스 확 풀리는 매운 맛이 없었다. 빨간색이란 빨간색은 죄다 빼버려서 마치 칼라티비로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친정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가 간절했다. 결혼하기 전, 엄마아빠랑 같이 살 때 우리집은 시간이 되는 사람이 저녁 준비를 해놓곤 했다. 각자가 바쁘다보니 다 함께 둘러앉아 식사를 할 순 없었지만, 혼자든 둘이든 밥 때가 되면 집에 돌아와 누군가 끓여놓은 국을 데우고 밥, 김치, 냉장고 반찬을 식탁에 올리면 10분 만에 따뜻한 한 상을 차릴 수 있었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서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던 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서도, 온기가 있는 밥상을 차려 먹을 수 있을 때 실감했다. 


친정아빠표 김치찌개

국을 먹을 때마다 데우면 처음의 아삭함, 신선함이 없어져서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여러번 데워도, 아니 오히려 더욱 맛있게 먹었던 메뉴는 김치찌개다. 특히 우리아빠가 끓인 김치찌개는 데우면 데울수록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예술이었다. 국을 데우고 데울 때마다 쫄아든 국물, 뭉근하게 끓여 손만 닿아도 흐물한 김치찌개는 데울수록 맛이 배가 됐다.


2주간의 조리원생활을 끝으로 집에서 음식을 먹는 날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조리원에서 집에 온 날, 남편은 고맙게도 친정부모님을 불러줬다. 아기를 낳고 처음 엄마아빠를 보는 순간, 너무나 보고싶었고,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고, 그동안 정성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대신 이 말이 튀어나왔다. 

아빠, 나 아빠가 끓여준 김치찌개 먹고싶어

아빠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결혼한 딸 집에 와서까지 요리라니. 그런데 마음이 통했던걸까. 친정부모님은 이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봇다리에서 선물 쏟아내듯 음식을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데, 지퍼팩에 아빠가 집에서 끓여온 김치찌개도 담겨있었다.


아빠의 김치찌개는 간단하면서도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 듬성듬성 썰어넣은 돼지고기를 보글보글 끓기 전 물에 넣고 오래도록 끓여 기름이 충분히 물에 녹아들게 둔다. 굵은 멸치를 함께 넣어 육수 끓이고 마늘 넣고 국간장 한스푼, 고추가루 한스푼, 매실액 반스푼 그리고 엄마의 배추김치 퐁당! 


아 ,여기서 엄마의 김치 자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엄마는 다른건 몰라도 김치를 정말 맛깔나게 버무린다. 양념 할 때 참다랑어포, 다시마, 무, 파뿌리까지 아낌없이 팍팍 넣어 뭉근하게 끓인 육수를 베이스로 해서 양념에는 알굵은 배, 사과, 무를 갈아넣어 버무린다. 시원하고 감칠맛이 끝내준다. 이 둘의 콜라보로 탄생한 아빠표 김치찌개는 영화제 수상소감처럼 엄마의 김치를 중심으로 '밥상에 숟가락 얹었다'기보다 오히려 원작을 리메이크해서 대박난 영화 같았다.


부모님이 싸온 김치찌개를 보고 나는 아기를 얼른 침대에 내려놓고 달려나와 식탁에 앉았다. 

"와 진짜 맛있어, 나 이제 아픈거 다 나은 것 같아" 


그날 따뜻한 흰 쌀밥에 아빠표 김치찌개 한그릇 딱 두가지를 놓고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기를 낳고 산부인과 검진에서도 아무 이상이 없었지만 몸 여기저기가 힘도 없고 아픈 것 같았는데, 그냥 한번에 싹 나았다. 


울진 않았지만 속으론 엉엉 울고 싶었다. 아기를 낳아서 갑자기 '찐 어른'이 되어버려 불안했는데 정처없이 거리를 걷다가 잃어버린 고향을 찾았을 때의 딱 그 기분이었다. 엄마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는 나에게 엄마아빠가 "걱정마, 힘들면 언제든 와서 쉬어"라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해서 감사함을 몰랐을 때, 아빠표 김치찌개를 매주 먹던 그시절엔 한번도 이 김치찌개를 소울푸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산후조리를 하며 내 소울푸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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