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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Sep 05. 2017

타자의 추醜

-데이비드 워나로위치-

다르다’ 라는 것

나도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영화 <윤희에게>의 대사).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을 막 지났을 때였다. 한 커플이 연리지나무 처럼 한 몸이 되어 출입문에 기대어 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자의 모습이 어딘가 석연찮았다. 옷차림과 화장이 너무나 선언적이라 오히려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여성성! 나는 날렵하게 눈동자를 굴려 그녀의 무릎뼈와 콧대를 재빠르게 훑었다. 엇, 촉이 온다. 이번에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귀에 꽂은 이어폰 한  쪽을 떼고서 그녀의 목소리를 분별하기 시작했다. 역시, 그녀는 태생적이 아닌 선택적으로 여성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매서운 눈썰미를 만족스럽게 확인하던 차, 불쑥 머릿속을 관통하는 따끔한 일갈이 있었다. ‘So What?’ 그러자 곧 무거운 절망감이 현기증처럼 나를 덮쳐왔다. 그동안 나는 로즈 셀라비(Rose Selavy)라는 가명까지 쓰며 여성이 되고 싶어 했던 마르셀 뒤샹과 보헤미안적인 기질과 동성애의 성향을 지닌 앤디 워홀의 삶과 작품을 탐닉하고, 팝 가수 프린스의 음악을 들으며 아방가르드의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지성의 그물을 짜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지행불일의 한심한 작태란 무언가? 고백건대 뒤늦게 차린 반성의 행위라는 것도 고작 그들로부터 나의 유별난 시선을 거두는 것이 전부였다.

 그날공교롭게도 나는 데이비드 워나로위츠의 예술세계를 접했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보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를 적대시하는 세상에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나를 병든 사회에서 서서히 분리시키는 쐐기였다(데이비드 워나로위츠)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미국 뉴저지의 레드뱅크라는 작은 타운에서 태어났다부모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아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이혼을 했다선원이자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 손에서 길러진 워나로위츠와 그의 형제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혹한 학대를 받으며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다아버지가 아이들에게 가한 폭력은 신체적 폭력에 그치지 않고 성적정신적 학대로까지 이어졌다
 그는 고등학교 과정도 못 마친 채 길거리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다. 더럽고 깡마른 몸뚱어리를 팔기 위해 뉴욕 이스트의 소란한 밤거리를 정처 없이 부유했다섹스는 그에게 유일하게 타인과의 접촉이 허용되는 수단이었다. 상대를 구하는 게 신통치 않은 날이면 그는 참을 수 없는 공허와 외로움을 자위로 달랬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얼굴 꿰매기 작업>


 불안과 두려움은 늘 그의 목을 옥죄었다. 자신이 동성에게 매혹된다는 사실을 일반 사람들(이성애자들)이 알면 그를 정신병자로 치부하거나 해코지를 할지도 몰라 늘 경계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혹 사특한 무리들에게 붙잡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히스테리는 날로 심해졌다. 당시는 동성애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기 위해 시작된 스톤월 항쟁(Stonewall riots)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므로 동성애자로서 살아가는 게 지금보다 훨씬 힘겨웠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하여–혹은 대우받기 위하여-어떤 돌파구가 필요했던 것일까. 워나로위츠는 예술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사회의 엄중한 검열‧정화의 물결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폐기 처분되게 놔둘 수 없었으리라.


격리와 연결 사이


 워나로위츠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인간 군상을 경멸하고, 고립시키고, 침묵시키는 이 사회의 자명하지만 은폐된 폭력성을 사진작으로 담았다. <얼굴 꿰매기 작업>은 군중 속의 고독한 개인이자 목소리를 잃은 자신과 같은 소수자를 은유한다붉은 끈으로 입을 꿰맨 이 작품은 역설적으로 강제된 침묵에서 벗어나려는 저항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정치가들은 이 아이에게 반대하는 법을 제정할 것이다. 어느 날 가족들은 그 자녀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줄 것이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가족의 후세에게 그것을 물려줄 것이다. 그 정보는 이 아이의 삶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이 아이는 전기 자극, 마약, 실험실에서의 조건 요법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집과 시민권과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자유를 상실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그가 자신의 벌거벗은 신체를 다른 소년의 벌거벗은 신체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욕망을 발견한지 1, 2년 안에 발생할 것이다.”

  그의 대표작 <랭보 연작>을 살펴보자. 워나로위츠는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동안 프랑스의 시인 랭보1 의 얼굴을 가면으로 만들어 쓰고서 뉴욕의 거리와 지하철, 카페, 푸줏간, 첼시 부두 등을 오가며 흑백사진을 찍었다. 가면은 진짜 얼굴을 보여줄 수 없거나 보여주지 않으려는 의지를 표상한다. 즉 가면 속에 진짜 자아를 감춤으로써 타인의 경멸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과 수치심 없이 타인의 비밀을 보고 싶다는 관음적인 욕망이 내포되어 있다.

  밤마다 가면을 쓰고 어슬렁거리며 그는 거리의 부랑자들과 노숙자들, 매춘부들을 만났다. 뿐만이랴. 골목에서 성교를 하는 사람, 누군가에게 얻어터져 얼굴에 피를 철철 흘리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 심지어 칼을 휘두르며 그를 잡고 위협하는 사람도 만났다. 이 악취 나는 미궁 속에서 워나로위츠는 자신과의 교차점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던 것이다. 


얻어맞아도 괜찮아, 죽어도 괜찮아, 외톨이보다는 나아(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중에서).
데이비드 워나로위츠,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연작>, 1978-78

 어느날, <성적 의존성의 발라드>라는 사진집으로 유명한 예술가 낸 골딘이 워나로위츠를 찾아가 <랭보 연작>에서 가장 이루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나는 사람들이 소외감을 덜 느끼게 하고 싶어나에게 제일 의미 있는 건 그거야. (...) 신발을 통해 느껴지는 그 소리의 파동이순식간에 느껴지는 외로움이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는 유리 벽 안에서 숨 쉬는 것 같은 기분이 어땠는지. (...) 내가 혈관을 갖다 붙여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텐데내가 당신 몸을 열어서 당신의 피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당신 눈으로 내다보고 당신의 입술과 내 입술이 영원히 한데 합쳐질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텐데.”2


 나의 다시 생각한다. 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보다 격하게 표현하자면 나를 적대시하는 세상에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순간 내 옆자리로 워나로위츠가 다가와 앉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인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이 익명이거나 이상하게 생겼다고 여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매력적이지 않거나 사회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 사이의 말해지지 않는 연대가 있다.”3           




1)랭보는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16세에 학업을 포기하고 방랑 생활을 하며 시를 썼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부르주아의 도덕관을 비판하였고 동성애자였다.

2) 올리비아 랭, 김병화 옮김,『도시의 우울』, 어크로스, 2016, 189쪽.

3) 위의 책,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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