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미술 칼럼

내 손에 달린 단 하나 뿐인 예술

-브리오 관계예술, 미디어 파사드, 어린 왕자-

by 양양

근대미술을 너머 새롭게 대두되는 예술양상을 소위 ‘컨템퍼러리 아트', '포스트모던예술'이라고 부른다.이는 동시대성, 역동성, 인식의 전환을 특징으로 하는 대단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예술유형이다. 상호적이고 연대적 관계를 필요로하는 이 예술 패러다임은 '관계미학' 으로 설명할 수 있다. 미술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니콜라스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말하길 "관계예술가는 세계와의 관계를 창조하기 위해 이질적인 단위들을 일정한 수준에서 결합하고 지속시키는 형식을 창조한다.” 그의 말은 예술을 창조하는 데 있어 예술가 이외에 다른 주체가 있음을 시사한다. 그동안 예술가는 예술작품의 창조자로서 능동적인 존재이고 관람자는 관조적으로 작품을 감상하는 수동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롤랑바르트가 포스트모던예술의 특징으로 '저자의 죽음' 을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관람자는 더이상 수동적 존재로 머물지 않고 작품 창작 과정에 능독적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들의 '참여'가 이제 예술이 되는 것이다. 관람객, 예술가, 작품간의 관계맺음이 작품 완성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전례없는 창조적 예술작품을 탄생시킨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살펴보자. 칼 심스Karl Sims의 '갈라파고스' Genetic images을 보자.


Karl Sims, Genetic images,1933
Karl Sims, Genetic images, 1993
Karl Sims, Genetic images,


‘갈라파고스’는 예술가이자 프로그램개발자인 칼 심스의 작품이다. 생물공학을 전공한 그는 동시다발적인 식물의 성장과 유전자 복제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 현상을 예술의 주제로 삼고, 관객의 참여를 동인으로 가상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작품을 선보였다. 12대의 컴퓨터는 가능한 경우수를 모의실험해서 매번 다른모양의 추상적인 생명체를 스크린에 보인다. 관객은 그 중에서 가장 맘에드는 생명체를 꼽는다. 관객에게 선택받은 생명체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는다. 살아남은 생명체는 다시 교합하고 분리하면서 돌연변이를 일으킨다. 그리고 다른 관객의 참여에 의해 다시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진화의 과정을 거듭한다. 요약하자면, 칼 심스의 '갈라파고스'의 기본 알고리즘은 컴퓨터로 프로그래밍된 생태계가 관객의 참여를 동력으로 매번 다른 생명체(예술작품)로 창조되는 것이다. 이때의 예술가는 절대적인 창조자가 아닌 프로그램설계자에 지나지 않으며 관람객의 선택에 따라 작품은 끊임없이 유동한다.

다음으로 살펴볼 예는 미디어 파사드이다. 미디어 파사드는 시각중심으로서의 -고전적 의미의- 심미적 체험에 종말을 고하고 보다 확장된 지각방식으로 새로운 의미에서의 심미적 체험의 탄생을 알린다. 건물의 입면에는 거대한 열린 공간이 펼쳐지고 가상 속 공간과 현실이 서로 대화하며 관람자는 이 가상공간에 몰입하여 예술 공간을 다감각으로(보고, 듣고, 만지고, 움직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전통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관람객은 정지한 상태에서 시선을 소질점에 고정시키고 원근법의 질서에 강제 되었다. 그러나 미디어 파사드는 주어진 혹은 작가가 제시된 방향을 따르지 않고 관람객 스스로가 감상의 방향을 설정하고 다감각을 이용해 주체적인 경험을 하게끔 한다.


Seoul Square Media Facade


이 새로운 심미적 체험은 예술작품과 관람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이 소통을 ‘상호작용성’이라 한다. 상호작용성은 현재 뉴미디어아트, 디지털 미학에서의 가장 중요시하는 특징으로 꼽힌다. 예술가는 기계와 상호작용하고, 관람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이용해 프로그램 된 프로세스에 참여해 예술을 조작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 이와같이 적극적이고 원활한 소통은 유희적 체험이며 이를 더 확장하면 ‘놀이’가 된다. 랑시에르Ranciere 는 예술에서의 매체란 단순히 예술가가 작업을 위해 쓰고 싶어 하는 재료가 아니라 감각되는 환경이고, 각각의 특수한 감각중추(particular sensorium)라고 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관객은 자유롭게 놀이 할 수 있는데 “인간은 놀 때만 인간 존재다”(Man is only fullly a human being when he plays) 라고 주장한 프리드리히 폰 쉴러 Friedrich von Schiller의 말처럼 “노동의 복종성”(the servitude of work) 을 전복시키는 ‘놀이의 자유’를 종래의 예술 개념을 해방시키는 전략으로 제시한다.





여기에는 혁명성이 함의되어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혹은 종교적 의식이 분명한 예술 작품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비판적 읽기를 하도록 유도해 왔다. 그러나 디지털예술은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을 기호로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을 매개로 한 오락산업이나 디지털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로운 활동이자 결정 불가능성인데, 이것이 그대로 예술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술을 의미의 모호성이나 불확정성, 어떤 내포된 아이콘을 읽고 그 숨겨진 코드를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로서가 아니라, 관객의 참여와 유희를 통해 소비되는 놀이문화로 보는 것이다. 기성의 예술 기호학자들이 강조해온 해석으로서의 예술론을 전복시키는 매우 혁명적인 예술 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술가와 관람객과 작품간의 상호작용이 중시되는- 예술의 혁명성은 오직 놀이와 자유로서의 의미에 국한될까? 글쓴이는 생텍쥐페리의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 <어린왕자>로부터 힌트를 얻어 또다른 혁명성을 가늠해본다. <어린왕자>를 보면 여우와 어린왕자가 다음과 같이 대화하는 대목이있다.


여우: "넌 아직은 나에겐 수많은 다른 소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너를 필요로 하지 않고. 너 역시 마찬가지 일거야. 난 너에겐 수많은 다른 여우와 똑같은 한 마리 여우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겐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어린 왕자: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여우: "그건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뜻이야."

(...)

어린 왕자는 장미꽃을 보러갔다.

어린 왕자: "너희들은 나의 장미와 조금도 닮지 않았어. 너희들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야. 그들에게 그는 말했다. "아무도 너희들을 길들이지 않았고 너희들 역시 아무도 길들이지 않았어. 너희들은 예전의 내 여우와 같아.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우야."




위의 어린왕자의 이야기를 통해 보건데, 이제 현대 예술이 담보할 수 있는 예술의 혁명성 내지는 창조성은 예술가-관람객-작품간의 밀접한 관계도모일지 모른다. 여우와 어린왕자와 장미가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서 서로에게 가장 특별한 존재가 되었듯. 예술가-관람객-작품이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이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예술'을 탄생시키는 거다.

내 손에 달린 예술, 단 하나뿐인 나만의 예술로 거듭나는 것이다.


iRiS Multi-User Interaction on Media Facades through Live Video on Mobile Devi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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