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은 빌딩, 정맥처럼 뻗어나간 대로, 수백만의 인파와 수십만 대의 차량들, 번쩍이는 전광판과 형형색색의 네온사인, 촘촘한 아파트 창문 불빛으로 황홀하게 출렁이는 도시의 야경....... 우리에게 친숙한 도시의 얼굴이다.
도시는 경제, 매스미디어, 성장으로 결집된 스펙터클한 유기체로 온갖 욕망의 세포를 증식하며 몸집을 불린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물신주의로 가득한 이 유기체의 얼굴에 언뜻 언뜻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표정이 드리운다. 공원에 광장에 담벼락에 조형물, 퍼포먼스, 벽화가 행해지며 슬쩍 슬쩍 새로운 분위기가 주입되고 있다.
미술과 행정의 콜라보레이션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설치된 애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sawyerbengtson, ⓒunsplash.com/photos/tnv84LOjes
공공미술은 오늘날 미술계와 지역사회에서 모두 중요하게 다루는 화두이다.
삶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공통된 인지를 기반으로, 지자체는 미술을 지원하고 미술은 잘 가꿔진 도시 이미지 구축과 도시공간을 미적으로 활용하는 데 지자체와 적극적으로 협업한다.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세운 도시계획이란 게 과거에는 공공주택을 짓고 치안을 유지하고 위생을 신경 쓰는 생존배려책에만 머물렀다면, 이제는 문화영역과 미적생산 인프라를 조성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도시발전정책이 변화하고 있다.
공공미술은 이러한 도시개발 전략과 새롭게 요청되는 공공복지 정책과 맥을 같이하며, “모두를 위한 문화”(힐마르 호프만Hilmar Hoffmann)라는 모토에 부합하는 신 장르 미술로 떠올랐다.
대중성과 사용가치
유리벽으로 보호된 모나리자 그림과 그 앞에 몰려든 사람들, ⓐmbaumiⓒunsplash.com/photos/3KBlVVWwA18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소장품 중 많은 수가 약탈문화재인 탓에 소위 정복 미학의 산물이라고도 불리는 미술관은 권력자의 욕망과 영광을 전시하고, 미술지식과 심미안이 있는 미술엘리트만을 감상의 주체로 삼는다는 비판을 종종 받는다.
공공미술은 이 담장 높은 미술관을 뛰쳐나와 시내 광장으로, 마을 공터로 자리를 잡으며 고급미술과 대중미술의 구별을 허문다.
미술관의 하얀 벽으로부터, 높은 좌대로부터 내려온 공공미술은 ‘만지지 마시오’라는 권위 표를 떼고 대중들의 자유로운 접근을 허용한다.
“미술의 본질은 공공성에 있다”, 라고 본 미학자 힐데 하인(Hilde Hein)의 주장처럼, 이제 미술은 유구한 세월 켜켜이 입고 있던 초월성과 제의의(ceremonial) 옷을 벗어 던지고 대중성과 사용가치, 그리고 공공성에 부합하는 지의 여부를 논의한다.
작품 그 자체의 조형적 형식미에만 치중하는 모더니즘과 결별하고 미술이 환경과 사회적 책임에 무관하지 않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공공성, 공공장소, 공공미술
-드롭 조각(drop-sculpture)
그러나 1970년대 이전에 행해진 공공미술은 아직 모더니즘의 미학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시카고에 설치된 <시카고 피카소>(1967)가 있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화가 피카소가 만든 것으로, 화가의 유명세와 개코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친숙한 이미지 때문에 금세 시카고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피카소가 그의 아내 재클린과 기르던 애완견의 이미지를 혼합해 만든 추상물로, 그것이 놓인 장소의 사회‧문화적 맥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나라에도 유명미술가의 설치미술품이 몇 점 있다. 그 중 서울 시청 광장에서 볼 수 있는 <샘spring>이 가장 유명하다.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설치미술가 올덴버그의 작품으로, 2006년 9월 28일 청계천 복원 1주년을 기념해 주문 제작됐다. 높이 20미터의 다슬기 모양으로 무려 35억 원의 돈이 투입 된 <샘>은 설치 초기에 국내미술계에 거센 반발을 샀다. 서울시에서 공공미술을 발주할 때 국내 작가를 배척하였고, 올덴버그는 서울을 방문하지도 않은 채(공동작업자인 아내 코샤 밴 브룽겐만 서울 방문했다)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샘>이 청계천이란 장소와 그 장소에 담긴 내러티브, 주 감상자인 서울시민들을 고려해서 만들어졌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비판을 듣는다.
이와 같이 보건대 ‘공공’이라는 표제는 작품의 전시공간이 단순히 열린 공공장소라서 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공공성은 작품의 주제가 장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지역사회의 이야기와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을 담는 것에서 확보된다. 장소와의 아무런 맥락 없이 공터에 덩그러니 놓인 드롭 조각(drop-sculpture)은 단순히 장식성과 도시 홍보의 수단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공공미술의 개념이 장소와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보다 구체화 되면서, 공공미술은 재정의 되기 시작한다.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1981)는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이라는 새로운 미술실천을 촉발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높이 3m 65cm, 길이 36.5m의 규모로 뉴욕 맨해튼 연방 광장 앞에 설치된 이 조형물은 거대한 크기 때문에 시민들에게 설치 초반부터 많은 원성을 샀다. 통행에 불편을 겪어 성난 시민들은 조형물을 철거하라고 아우성이었고, 빗발치는 민원에 곤혹을 치르던 뉴욕시는 급기야 작가에게 작품을 다른 장소에 옮길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리처드 세라는 작품이 놓인 바로 그 장소를 떠나면 작품의 의미가 없어진다며 거절했다. 이에 작가와 연방정부는 무려 9년에 걸친 법정 공방과 공청회를 거쳤는데 이때 리처드 세라가 내세운 주장이 장소와 작품은 때려야 땔 수 없는 불가분 한 관계에 있다는 장소 특정적 미술의 개념이다.
<기울어진 호>는 공공의 권리가 우선한다는 법원의 판결에 따라 결국 철거되었다. 이 사건은 미술가의 표현의 자유와 공공의 권리가 대립하며 마찰을 일으킨 사례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소통하는 미술
한성자동차 후원, 서울문화재단 진행 공공미술, <소원반디>
1980년대 말까지 전개된 공공미술이 장소에 중점을 뒀다면, 1990년대 초 이후에 전개된 공공미술은 ‘소통’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안토니 곰리의 <북방의 천사>(1998)는 길이 54m, 높이 20m. 무게 200톤의 초대형 조형물로 영국 게이츠헤드의 랜드마크이다. 이 지역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탄광산업의 쇠락으로 오랫동안 경기침체에 빠졌고 급기야 영국에서 경제수준이 가장 낮은 도시에 꼽혔다. 그러나 <북방의 천사>로 인해 도시는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고 흩어진 공동체를 결집시켰다.
조형물 설치에 드는 돈은 시정부 예산이 아니라 복권기금과 외부자본을 유치하여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최소화 하였고, 조형물을 만드는 8년이란 시간 동안 무려 6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생성하여 침체된 지역경제를 살려냈다.
소외된 탄광촌은 이 조형물로 말미암아 예술도시로 거듭나게 되었고, 모두를 끌어안고 화합하려는 듯 두 팔 벌리고 선 조형물의 형상처럼 지역주민들에게 희망의 증거물이 되었다.
지난 10월 3일부터 6일 서울 시청광장 일대에서 진행된 서울거리예술축제에서도 지역사회와 공동체의 희망을 논의한 미술이 있었다. 한성자동차가 후원하고 서울문화재단이 진행한 공공미술프로젝트 <소원반디>이다.
‘우리가 꿈꾸는 친환경도시, 예술 도시’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한 <소원반디>는 그것이 내건 이름처럼,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들이 시민참여부스에서 자신이 바라는 에코시티의 이상을 담아 직접 태양광 충전 소형등을 만들고 소망의 등불을 밝히는 작업이다. 흥미롭게도 공공기관과 기업의 협업으로 공공의 장이 마련되었고, 시민들의 참여와 개입으로 미술의 본질을 구성한 사례이다. 다가오는 11월 중순경부터는 한성자동차 미술영재 장학프로그램 ‘드림그림’ 학생들과 한성자동차 임직원, 그리고 시민 5000여명이 함께 참여하는 <소원반디>가 덕수궁 인근 가로수길에 전시된다. 개인의 소원을 담은 소형등과 공동체의 염원과 이상을 표현한 브릭아트 단체작품을 선보인다. 한성자동차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예술’을 위해 고령자나 신체장애인이 아무런 장벽 없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수어통역 및 음성해설 등을 제공하는 배리어프리 지원금을 추가 지원한다.
인간다운 삶과 공공미술의 비전
우리에게 살고 싶은 도시, 머물고 싶은 도시란 꼭 고급화된 주택과 소비와 오락거리의 풍요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과 인간다움에 대하여 깊이 있는 성찰을 꾀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엔 구성원들이 소외되지 않고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고 참여하고 연대할 수 있는 공공영역이 필요하다. 상상력과 비평이 살아 숨 쉬는 공간에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사유하는 힘을 기르며 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공공미술은 우리에게 심미적인 만족 뿐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정치적 체험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문화‧예술‧사회적 실천이 된 공공미술을 두고, 한 켠에선 미술이 미술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잃고 사회복지사업으로 전락한다는 비난도 인다. 하지만 공공미술가들은 이 비난에 맞서 오늘날 미술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가의 천재성이 아니라고 되받아 친다.
“예술의 미래는 예술적인 것이 아니라 도시적인 것이다”라는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 르페브르(Henri Lufebvre)는 진단처럼, 도시와 함께 발전하는 공공미술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다.
사회문제에 대한 소극적인 비판과 거리두기를 하는 모더니즘의 미학이 아닌 우리의 일상공간을 공공을 위한 논의의 장으로, 또 예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공공미술의 앞으로의 귀추가 더욱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