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방안에 한줄기 빛이 비스듬히 떨어지고 있다. 이 빛줄기 아래로 한 소년이 짙은 어둠을 뚫고 하얀 꽃처럼 피어나 있다. 가슴이 푹 파진 흰 셔츠를 입고 손에는 류트를 쥐고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그 모습이 묘하게 관능적이다. 풍성한 검은 머리칼에 큰 눈망울, 발그스레한 볼과 반쯤 벌린 입술, 그리고 저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보라! 넓은 어깨와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와는 대조적으로 어딘지 모르게 여성적인 느낌을 강하게 풍기는 외모다.
카라바조, <류트 연주자>, 1595-1596
소년의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탐스러운 과일과 한 아름의 생기 있는꽃들로 채워진 화병이 놓여있다.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렸는지 과일의단단한 물성과 꽃잎의 싱그러움이 손대면 그대로 전해질 듯하다. 심지어 화병에는 빛에 반사된 창문까지 그려져 있다.
펼쳐진 악보를 보아하니 소년은 지금 사랑의 찬가 마드리갈을 노래하는 중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나요”라는 제목의 이 곡은 16세기 초중반에 이탈리아에서 유행했던 장르로 아름답고 감성적인 가사가 특징이다. 당대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여 궁중 사교모임에서 자주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년이 연주하고 있는 류트의 밑단을 자세히 보니 살짝 실금이 나 있는 게 보인다. 사랑의 선율을 연주하는 류트에 흠집이라니? 아아, 안타깝게도 사랑이 깨져버린 것이다! 어쩐지 소년의 큰 눈망울에 금방이라도 유리알 같은 눈물이 툭 떨어질 것만 같다.
류트 연주자 부분
수 많은 미술 비평가들은 이 그림이 카라바조의 동성애적 성향을 보여주는 자화상이라고 입을 모은다. 물론 이와는 다른 해석도 있다. 소년의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복식사적으로 검토하면, 당대 상류층들이 즐긴 연극의 분장 문화와 관련 있다는 해석이다. 당대 이탈리아 귀족들이 즐긴 최고의 오락거리인 연극은 옛 그리스식의 전통을 살린 것으로, 소년 배우들을 여성처럼 분장시켜 무대로 올렸다고 한다. 여성용의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하얀 리본을 머리에 달았다고 하니 그림 속 류트 연주자의 모습과 흡사할 게다. 그러고 보니 한 줄기로 떨어지는 빛이 꼭 연극무대의 조명 같기도 하다. 류트을 연주하는 소년은 어두운 무대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는 연극배우처럼 보이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카라바조의 그림을 그의 동성애적 코드로 읽는 시각은 설득력이 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에 여성스럽고 도발적인 남성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도 화가의 떠들썩한 사생활이 이 추론에 무게를 싣는다. <류트 연주자>와 같은 해에 그려진 <연주자들>은 이를 뒷받침하는 주요한 예로 꼽힌다. 이 그림은 델 몬테 추기경의 의뢰를 받고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델 몬테 추기경은 예술에 조예가 깊은 교양인이자 진보적인 성직자로 카라바조의 몇 안 되는 그림 구매자 중 한 사람이었다. 카라바조의 탁월한 미술 재능을 알아본 추기경은 심지어 자신의 저택에 와서 살도록 권하며 아낌없는 후원인이 되길 자청하였다. 델 몬테 추기경을 만난 이래로 카라바조의 미술 경력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류트 연주자>를 비롯해 음악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 이때 탄생한다. 그런데, 당시 교회마저 음악의 부흥을 장려할 정도로 로마의 문화예술은 음악을 주제로 다룬 게 인기가 높았으나 카라바조의 그림은 여느 그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음악가>를 자세히 살펴보자.
카라바조, <음악가>, 1595
그림에는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네 명의 젊은 사내들이 보인다. 한쪽 어깨에 붉은 벨벳 망토를 걸치고 우리를 향해 정면을 보고 앉은사내가 류트를 켜며 연주를 리드한다. 오른쪽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사내는 악보를 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다. 이 사내 앞에 앉아 콘네토를 연주하는 사내가 나직이 화음을 맞춘다. 화면의 왼쪽 뒤편에 앉아 있는 사내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포도송이만 만지작 거리고 있다. 날개 달린 큐피드의 모습이다.참으로 야심차고 복잡한 구성이다. 이 네 명의 사내들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제각기 독립적이다. 이들은 카라바조가 실제로 관찰하여 묘사한 현실 인물들이자 바로크의 미술답게 '사랑'과 '음악의'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보통 음악이-이 시대의 일반적인 회화적 문법으로는-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던 것에 반해 카라바조는 의도적이고도 도발적으로 여성의 자리에 남성을 그려 넣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콘네토 연주자를 카라바조의 자화상이라고 보는데 이견이 없다. 카라바조가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고 알려진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류트 연주자는 카라바조의 동성 연인인 마리오 미티니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류트 연주자의 눈이 눈물로 촉촉하다. 사랑의 상징인 큐피드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모습 또한 의미심장하다. 아무래도 이들의 사랑은 기쁨이 아닌 슬픔을 담고 있는 모양이다.
금지된 사랑이 몰고 온 비극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의 카라바조는 콘네토를 내려놓고 풍성한 과일 바구니를 품에 안고 있다. <음악가> 속 그와 동일한 포즈를 취하고, 한쪽 어깨를 드러내며 우리와 눈을 마주친다. 자신에 대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수줍고도 망설이는 표정이다.
카라바조,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 1593
어깨 근육과 깊게 파인 쇄골 뼈, 흘러내린 블라우스의 자연스러운 주름, 탐스럽게 묘사된 과일은 사물에 대한화가의 놀라운 관찰력과 숙련된 회화 기법을 보여 준다.
표면적으로는 인물과 자연을 그림 그림에 지나지 않아 보이나 이 그림에도 역시 숨겨진 알레고리를 찾아볼 수 있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생기 있는 포도 방울과 붉은 입술 처럼 탐스럽게 익은 사과는 화가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반면에 군데군데 벌레 먹은 흔적이 선연한 이파리와 손대면 부스러질 것 같이 말라버린 잎은 결국엔 사라질 젊음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말한다.
그림 <도마뱀에 손가락을 물린 청년>에서는 카라바조가도마뱀에 손가락을 물려 깜짝 놀란 모습이다. 이 그림 역시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귀에는 하얀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았다.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많은미술 비평가들이 이를 '자웅동체', '호모 섹슈얼리티'의 상징으로 읽는다.
카라바조, <도마뱀에 손가락을 물린 소년>, 1594-1596
그리고 순간의 리얼리티가 잘 포착되었다. 도마뱀에 검지 손가락이 물리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몸을 뒤로 빼는 모습이 실감 난다. 화면에는 그의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도마뱀에게 물려 아파하는 모습은 금지된 사랑-여기선 동성애-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뒤따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금지된 사랑에 슬퍼 눈물짓는 소년의 모습보다 훨씬 더 강렬한 도덕적 교훈과 해학적인 우의를 담고 있다.
카라바조의 삶은 참으로 시끌벅적 했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위배되는 성취향을 가진 데다가 다혈질에 반항적인 기질도 한몫 거들었으리라. 그는 자주 싸움판에 걸려들었고 급기야 살인사건에도 연루되어 몰타 섬의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수배령이 떨어져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나폴리의 어느 해변에서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암살을 당한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가 채 마흔 살도 안 된 때였다.
카라바조, <병든 바쿠스>, 1593
마지막으로 카라바조의 자화상 한 점을 더 보자. 포도주와 환희(엑스터시)의 신 바쿠스(디오니소스)로 분한 그가 머리에 말라버린 월계수관을 쓰고 손에는 포도송이를 든 병자의 모습으로 어둠 속에서 우리를 쳐다본다. 푸른빛이 도는 낯빛과 불안한 눈빛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미한 냉소는 우울과 절망 속에서 그가 점점 미쳐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병은 바쿠스>는 그의 사랑과 삶이 심히 피폐함을 암시한다.
구약성서의 신은 가르친다. 지상에서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에 대한 갈망에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벌이 약속되어 있다고. 이에 괴테가 나직이 탄식을 내뱉는다. “온갖 것 보러 태어났건만 온갖 것 보아서는 안 된다 하더라”(파우스트).
혁신적인 예술세계를 이루었지만 금지된 사랑을 한 탓에 가혹하게 사장된 천재 화가 카라바조. 그는 신의 심판대에 섰을 때 어떤 항변을 쏟아냈을까?
[참고문헌]
김상근, 카라바조,『이중성의 살인미학』, 21세기북스, 2016.
로사 조르지, 하지은 옮김,『카라바조: 빛과 어둠의 대가』, 마로니에북스, 2008.
임영방,『바로크: 17세기 미술을 중심으로』, 한길아트, 2011.
질 랑베르, 문경자 옮김,『카라바조』, 마로니에북스, 2005
H.W. 잰슨 & A. F. 잰슨, 정점식 감수, 최기득 옮김,『서양미술』, 미진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