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노동자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고 맞추기 위해 애쓰는 존재라면, 예술 노동자는 타인의 감정을 스스로 대신 살아내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동화 '개미와 베짱이'를 기억할 것이다. 개미는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도 쉬지 않고 식량을 모았고, 베짱이는 나무 그늘 아래서 기타를 쳤다. 겨울이 닥쳐오자, 개미는 따뜻한 집 안에 머물렀고, 베짱이는 굶주렸다. 어린 시절 내게 이 이야기는 단순했다. 성실과 나태, 성공과 실패의 대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문득 떠올린 질문이 있었다. 정말 베짱이는 게으름뱅이였던가?
중학교 시절, 나는 예술고등학교에 가고 싶었다. 친구들과 함께 방과 후 교실 창가에서 작은 키보드를 두드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꿈을 키웠다. 그러나 현실은 차가웠다. 몇몇 친구는 꿈꾸던 학교로 진학했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부모님은 음악이 안정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믿으셨다. 아버지는 고된 노동으로 손마디가 굵어졌고, 어머니는 지친 눈으로 매일 밤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들에게 음악은 불안한 미래를 뜻했다. 간절히 설득해도 돌아오는 것은 "현실을 직시해라"라는 냉정한 말뿐이었다. 음악이란 단어를 꺼낼 때마다 부모님의 얼굴엔 깊은 한숨이 어려 있었고, 나는 결국 그 꿈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부모님의 눈에 음악은 결코 성실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나는 다시 음악을 잡았다. 그때마다 동화 속 베짱이를 떠올렸다. 그가 나무 그늘 아래서 흥얼거리던 기타 소리는 과연 어디서 왔을까. 그 음악은 아무런 노력 없이 손끝에서 흘러나온 것일까. 어쩌면 베짱이는 개미만큼이나 손가락 끝이 닳도록 연습하고, 귀를 열고, 온몸으로 소리를 익혀야 했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혼자 줄을 튕기고, 소리를 쌓으며, 자신의 마음을 한 조각씩 잘라 음악으로 옮겨놓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개미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을지 모른다. 다만, 그가 흘린 땀은 보이지 않는 땀이었다.
노동은 손끝에 굳은살을 남기고, 근육을 단단하게 만든다. 예술도 예술노동의 분야에 따라 비슷한 흔적을 몸에 남기지만 고보다 마음을 닳게 한다. 하나의 노래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끝없는 반복과 고독의 연속이다. 처음엔 작은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그것을 붙잡아 말과 문장을 입히고, 한 줄 한 줄 가사를 짓는다. 가사와 멜로디만으로는 부족하다. 코드를 고르고 화성을 쌓고, 구조를 설계한다. 수없이 소리를 만들었다가 허물기를 반복한다. 악보 위의 검은 점 하나하나엔 밤과 낮을 오간 무수한 망설임과 선택이 담겨 있다.
녹음실로 향하는 길은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다. 어렵게 완성한 곡이라도 마이크 앞에서는 낯설어진다. 어디서 숨을 쉬어야 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수십 번 녹음을 반복하며 소리를 깎고 다듬는다. 하루, 이틀, 때로는 한 곡을 완성하는 데 일주일이 넘기도 한다.
녹음이 끝나면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노동의 시간이 시작된다. 믹싱과 마스터링, 수많은 손길이 음의 균형을 맞추고 목소리의 결을 다듬는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은 다시 앨범이라는 형태를 갖추기 위해 여러 곡들과 함께 묶이고, 트랙을 정리하고, 재킷 디자인을 고민하며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린다.
무대에 오르기 전 연습실에서 연주자들과 함께 소리를 맞춘다. 공연 전날까지 무수히 반복해도, 무대 위 한순간의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는 공연의 순간은 찰나다. 공연이 끝나 불이 꺼지고 텅 빈 객석만 남았을 때, 나는 다시 혼자가 된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노동이라고 하냐고.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이 노동의 무게를 덜어주지는 않는다. 좋아서 한다고 해서 덜 힘든 것은 아니다. 예술도 명백히 노동이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예술을 노동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예술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무형의 가치를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예술가들은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해야 하는 것일까.
시대가 변하고, K-POP의 인기가 높아졌지만, 모든 예술이 주류의 빛을 받는 것은 아니다. 화려한 조명 뒤에는 여전히 그림자 속에서 자신의 소리를 내는 인디 뮤지션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노래는 화려한 수치나 산업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베짱이는 정말 빈둥거렸던 걸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그것이 아니라, 아무도 그의 노동을 노동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회에서, 예술의 가치는 과연 무엇으로 측정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