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여기는 러시아 모스크바
내 첫 직장은 중소규모 경제지였다.
원래는 휴먼 다큐를 찍는 교양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교양 피디를 뽑는 유일한 직장인 지상파 3사 입사 필기시험부터 주르륵. 아쉬워기도 부끄러웠다.
'PD는 선발인원 자체가 적으니까...' 하며 나 자신과 타협해서 신문 기자 시험도 쳤지만 가고 싶었던 신문사 시험에서도 예외 없이 낙방. 그렇게 줄곧 입사 불합격 소식만 듣다가 첫 직장이었던 작은 신문사에서 유일하게 최종면접에도 가고 합격 통보까지 받자 나는 다행스러운 마음 반, 자포자기 심정 반으로 신문사에 입사했다.
안일하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셈. 난 이내 나가떨어졌다.
수습기자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경제지라 경찰서에서 먹고 자며 사건 사고 취재를 하는 이른바 ‘사스마와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너무 힘들었다.
아침 7시 반까지 출입처로 출근을 해서 부서 부장에게 조간 보고를 해야 했는데, 사람 기죽이는 데는 도가 튼 우리 부서 부장은 매일 아침마다 크고 작은 건수로 나를 혼냈다. 단 한 번도 건강한 영혼(?)으로 하루를 시작해본 적이 없다.
더 힘들었던 건 점심 저녁으로 이어지는 술자리였다. 선배들을 따라 출입처 홍보팀과 술을 마시고, 출입처 술자리가 없는 날이면 윗 기수 선배들과 원샷 레이스 회식을 했다.
수습기자는 토요일에도 출근을 해야 했는데, 당직 선배가 굳이 낮술을 사줘서 일주일에 제정신인 날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출근길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고 무기력해졌다.
온몸 바쳐 한 기자 생활의 보수는 나를 더 무기력하게 했다. 정말이지 적은 돈이었다.
물론 언론사 입사를 꿈꾸며 두둑한 월급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수습 기간이라 기본급의 80%였던 내 첫 월급은 해도 너무했다.
첫 월급날, 계좌에 찍힌 월급을 보며 놀란 시선을 주고받는 수습기자들에게 선배들은 '선배들이 밥 사줘, 술 사줘. 돈 쓸 일이 뭐가 있냐'며 나의 적은 월급을 술자리 안주거리로 웃어넘겼다.
열정 페이. 그때는 이 단어가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난 엄청난 열정을 강요받았었다.
수습기자 생활 6개월 후, 나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일반 기업에 취직을 했다.
월급쟁이에게 만족할만한 월급이란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럭저럭 살만한 급여를 받으며 10년이 흘렀다.
그런데 마흔을 앞둔 나이에 내 인생 두 번째 열정 페이를 경험하게 됐다.
아기가 100일이 지난 후 시작한 중국어 번역 부업에서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고 보니, 이게 부업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번역도 창작의 일종이라 적확한 어휘와 말투를 고민하는 데 시간이 꽤나 들고, 대사 타이밍을 맞추고 맞춤법을 체크하는 등 기술적인 부분을 챙기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기가 8시에 잠들면, 저녁밥을 대충 쟁반에 차려 컴퓨터 앞에 앉아 밤 12시까지 번역일을 해야 업체와 약속한 번역 분량을 채울 수 있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 달을 보내고 내게 돌아온 페이는 100만 원이 채 안 되는 수준.
번역 단가, 특히 중국어 번역 단가는 미숙련 번역가에게는 최저시급보다 낮았다.
하지만 난 그 일을 반년 넘게 해오고 있다. 업체의 번역가는 나 같은 주부 부업인이 대부분이다. 내가 일을 그만두면 내 자리를 채울 다음 타자도 수두룩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소액이라도 벌어보고 싶은 사회경제적 욕망, 사회인으로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육아에 치이면서도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허함이 나 같은 주부를 부업 시장에 뛰어들게 만들었고, 공급이 넘치는 부업 시장에서 주부들은 '을 오브 더 을'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아기가 어린이집 간 사이 빵집 아르바이트를 해보려는 여자에게 여자의 남편은 괜한 고생하지 말고 쉬라고 한다. 적나라하게 해석하면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버느라 시간과 에너지 낭비하지 말란 얘기다.
나의 남편 역시 매일 밤 육퇴 하자마자 컴퓨터 앞으로 다시 출근을 하느라 피폐해지면서 고작 '몇 푼'을 받는 나를 보며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자라고 이해 안 간다는 식의 말을 했었다.
뭘 모르는 소리다. 주부들을 부업하게 하는 건 돈이 아니다.
사회에서 도태될 것만 같은 두려움, 욱아 말고 사회인으로서 뭔가 하고 싶다는 몹쓸 열정이 주부들을 부업 시장으로 내몬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나는 번역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업체 대표에게 "힘없는 주부라고 번역료를 너무 후려치는 거 아닙니까?!"라고 항의해보고 싶지만, 현실은 맞춤법 실수에 전전긍긍하는 힘없는 부업 근로자.
나는 이렇게 엄한 곳에 불평을 해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