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도착한 홍콩. 습하지만 더운 날씨가 아직은 추운 한국과는 확연히 다르다. 버스를 타고 호텔로 가는 길에 본 홍콩의 모습은 내가 영화로 봐오던 모습과 비슷하면서 다르다. 화면 속 홍콩은 우울함을 뿜어져 냈다. 알록달록하지만 어딘가 바래진 색의 오밀조밀 붙어 있는 건물들은 화면 안에서는 안갯속에 갇혀 흐릿하고 답답하게 보였다. 그러나 버스 창밖의 홍콩은 맑고 활기찼다. 보기만 해도 입이 벌어지는 높이의 고급 아파트들이 해변을 따라 줄지어 서 있다. 바다 색깔은 푸르고 하늘은 맑다. 멋진 풍경과 밝은 색의 도시가 낯설다. 여기가 홍콩이 맞나?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방문한 란퐁유엔. 직접 내린 차와 디저트 등 간단한 음식들을 판매하는 대중 음식점을 차찬탱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홍콩의 유명한 차찬탱 중 한 곳이다. 또 ‘우리가 사랑한 배우’ 장국영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 넓은 테이블 끝자리 두 자리를 안내받아 앉고 보니 맞은편에는 4명의 가족이 먼저 밥을 먹고 있었다. 홍콩의 음식점은 합석 문화가 있다. 우리는 혼자 식사하러 온 할머니와 함께 나란히 앉아 메뉴 주문을 했다. 모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밥을 먹는 다라. 낯설지만 싫진 않았다. 맞은편 사람들과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고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며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다. 장국영은 어디 앉아서 밥을 먹었을까? 무엇을 먹었을까? 누구와 왔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음식이 나왔다. 홍콩에서의 첫끼. 밀크티와 홍콩식 프렌치토스트를 앞에 두고 사진 한 장 찍고 얼른 먹어본다. 맛있다. 난생처음 먹어본 맛이다. 달달한 잼이 발려진 토스트를 튀겼으니 맛이 없을 수도 없겠지. 적당히 씁쓸한 밀크티와 먹으니 맛이 더욱 풍부해진다. 여기 진짜 홍콩이구나.
내가 처음 홍콩을 알게 된 건 학창 시절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그날은 홍콩영화 특집으로 여러 편의 영화를 소개해 주었는데 분위기가 독특하고 몽환적인 게 뭔가 있어 보였다. 그 후 영화와 함께 알게 된 배우 장국영이 나오는 영화를 한 편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땐 그 매력에 빠지질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의 감정과 함께, 영화 배경지인 홍콩이 너무 우울하고 낙후되어 보여서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홍콩영화는 난해하다고 생각하며 기억 속에서 잊혀 갔다. 다시 홍콩을 만난 건 10여 년이 흐른 20대 중반 어느 날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암 투병으로 아픈 엄마를 본가에 두고 서울로 올라와 뭐든 해야 했다. 엄마는 죽음을 앞에 두고 남겨진 자식들 걱정에 더욱 야위어져 갔다. 졸업은 했으나 마땅한 일을 하지 않는 첫째 딸인 나의 걱정이 특히 더 심했다. 아픈 와중에도 혹시나 엄마인 본인과 비슷한 삶을 살까 그래서 엄마와 같은 병을 얻을까 걱정했다. 엄마는 자신의 딸이 가족을 위해 살기보단, 큰 도시에서 본인의 이름으로 멋지게 살길 원했다. 나 역시 바라던 것이었다. 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서울은 너무 크고 정신없었다. 내가 뭘 잘할지,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떡해서든 이 큰 도시에서 나의 자리를 찾아야 했다. 혼란스러웠지만 방황할 시간도 나에겐 사치다.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엄마에게 얼른 자리 잡은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는 조급함으로 날마다 불안함에 흔들렸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하루를 살아낼 뿐이었다.
오전에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오후에는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늦게까지 일했다. 하루 끝엔 불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밤, 5평 남짓한 작고 작은 방 안에서 잠 못 이루며 뒤척이던 그날 밤 우연히 보게 된 티브이에서 다시 홍콩을 만났다. 홍콩의 분주한 골목과 낡은 맨션을 배경으로 한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과 이별은 어딘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마치 그때의 나처럼. 사람도 사랑도 다 스쳐 지나가는 복잡한 도시에서 인물들의 평범한 삶이 어쩐지 작은 위로가 되었다. 지금의 나도 실은 그저 지나가는 평범한 날들 중에 하나이니 우울할 것도 없다고. 영화 속 혼란스러운 도시 안에서도 사랑하고, 느리지만 성장하는 인물들을 보며 나도 결국엔 무언가가 되겠지라며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달까. 언젠가 꼭 저 도시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진짜로 뭐가 되긴 되었다. 차도녀(차가운 도시의 여자)가 되진 못했지만 제법 도시에 어울리는 직장인은 되었다. 다음 달 방세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로 벌고, 가격 때문에 먹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병마와 싸워 이겨낸 엄마의 잔소리 방어를 위한 용돈 정도는 언제든 고민하지 않고 줄 수 있다. 그러나 홍콩에는 못 가보았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겠다는 다짐하에 여행도 회사 업무처리처럼 효율적이게 다녔다. 짧은 휴일이 생기면 바다가 있는 도시로 나가 수영을 하고 여유를 즐겼다. 긴 휴일에는 저 멀리 떠나 먹고 마시며 예술 작품을 따라다니기 바빴다. 미리 계획했다면 또 선택지에서 제외되었겠지만, 홍콩에 가자는 친구의 즉흥적인 제안에 덜컥 이 도시에 도착했다. 내 인생에 절대 없을 일이지만 홍콩만은 그럴 수 있었다.
밥을 먹고는 소호 거리로 나갔다. 영화 배경지가 된 에스컬레이터도 타보았다. 영화에서는 꽤 로맨틱해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에 치여 정신이 없다. 어쩐지 영화로 이 도시를 너무 낭만 있게만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정신없는 것이 현실이겠지. 피식 웃음이 났다. 맛있다고 유명한 에그타르트도 40분을 기다려 먹었다. 마땅히 먹을 곳이 없어 길에서 먹으려다 또 사람들에 치여 어느 골목 구석에서 겨우 한입 베어 물었다. 세상에나 너무 맛있다. 바삭한 빵 안에 단 크림이 잘 어울린다. 이런 맛있는 것을 매일 먹는다면 도시의 정신없음이 한방에 잊히겠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 도시는 몽환적이지도 우울한 곳도 아니구나. 도시의 좁은 골목에서도 질서가 있고 바쁜 와중에도 배려가 있다. 작은 맨션에도 다양한 꿈을 갖은 사람들이 살고 있음이 창틀에 걸어 놓은 빨래 가지에서 느껴진다. 화면이 전부가 아니듯, 인생의 순간은 우울할지 몰라도 멀리서 보면 그 또한 아름다운 장면일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걷고 또 걷다 보니 문득 그 시절의 내가 그리워졌다.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삶이 힘들었지만 순간순간 나름의 작은 즐거움도 있었다. 언젠가 내가 이루고야 말 목표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던 시간들. 그때의 나는 불안했지만 긍정적이었고 돈은 없었지만, 목표는 있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애쓰던 그 시절의 내가 조금은 그립다. 아름다웠던 나의 시절. 지금의 나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리워질 것이다.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파인애플 통조림에도 유통기한이 있듯이. 아름다운 시절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겠다. 지금, 이 순간 또한 지나고 보면 그리울 나의 아름다운 시절이기에 매 순간을 행복하게 살기로 다짐한다.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바닷가에서 만난 야경이 너무 멋지다. 다른 건 몰라도 야경 이거 하나는 화면 속과 똑같다. 좋구나. 그렇게 홍콩에서의 밤이 깊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