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를 부탁해

'효율'에 밀려 사라지는 '과정'의 가치

by 배다현

신발 세탁 전문점 <운동화를 부탁해> 02) 854-98XX

일반 운동화 4,000원 유아 운동화 3,000원 세무 운동화 5,000원 등산화 5,000원…

수거·배달합니다.


원룸 1층 입구에 붙여진 전단지를 떼서 읽으며 계단을 오른다. 봄·여름 동안 돌려가며 신었던 운동화들 중 세탁이 필요한 것이 몇 켤레나 되는지 머릿속으로 계산해 본다. 세탁을 맡기는 것조차 귀찮아 미룬 것이 몇 달. 신발장 속에는 꼬질꼬질해진 운동화들이 한 가득이다. 자취를 시작한 뒤부터는 직접 빨지 않고 줄곧 세탁소에 맡겨왔다. 고향에 계신 엄마가 아시면 그게 뭐가 귀찮아서 돈 아깝게 맡기냐고 핀잔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좁은 원룸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운동화를 빠는 일은 생각보다 굉장히 수고롭다. 한 켤레를 다 빨기도 전에 다리가 저려오는 것은 물론이고, 다 빤 운동화를 말리는 것 또한 고민이다. 내 방은 남향이 아니라 창가에 두어도 몇날며칠을 마르지 않을 것이 뻔하다. 제대로 말리지 못한 운동화에선 빨기 전만큼이나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무엇보다 운동화를 직접 빨지 않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공들여 빨아봤자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점이다. 세탁 전문점에서 배달된 새하얗게 빛나는 운동화를 일단 한 번 받아보면, 그 이후부터는 직접 빨 생각 따위는 들지 않는다. 감히 한 번도 안 맡겨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맡겨본 사람은 없으리라 확신한다. 운동화만큼이나 꼬질한 고민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나는 쿨하게 켤레 당 사오천원의 돈을 지불한다. 까짓 거 치킨 두 번 덜 시켜 먹지 뭐.


불과 몇 년 전, 운동화 빨래방이 등장하기 전까지 운동화는 당연히 손세탁해야 하는 물건이었다. 엄마는 다른 건 다 빨아주셔도 운동화는 내 손으로 직접 빨게 하셨다. 운동화가 더러워지면 세제를 푼 물에 반나절 담가두었다가 낡은 칫솔로 삼십분이고 한 시간이고 박박 문질러 빨았다. 크기가 맞지 않는 고무장갑은 자꾸 흘러내리고, 얼굴과 옷에는 온통 더러운 물이 튀고,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 때문에 팔은 아파왔다. 웃기게도 항상 귀찮아서 툴툴거리며 시작한 작업이었지만, 빨다보면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세탁 장인이라도 된 양 문질러 대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다 빤 운동화를 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 널어놓고 나면 고된 노동 후의 뿌듯함이 나를 찾아왔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운동화의 하얀 앞코는 뿌듯함 그 자체여서 베란다에 쪼그려 앉아 잠시 동안씩 감상하곤 했다. 그렇게 직접 빤 운동화를 처음 신는 날이면, 새 운동화를 산 날처럼 길가에 더러운 곳은 밟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걸어 등교했던 기억이 난다.


전단지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운동화 수거를 요청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직접 해야 했던 귀찮은 일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각종 대행서비스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운동화빨래는 물론이고 새로 이사 간 집의 청소나 짐정리, 부모님 묘소의 벌초까지 이제는 대행이 가능하다. 이는 지불하는 금액에 비해서 너무 효율적인 서비스라서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최소 비용의 최대 효과. 시간과 노력을 아끼게 한 현명한 소비에 뿌듯함마저 느낀다. ‘효율’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과정’의 가치는 간단히 삭제되었다. 운동화를 빨면서 얻었던 순수한 노동의 기쁨이나 가치, 물건에 대한 애착은 세탁된 운동화와 함께 배달되지 않는다. 새 보금자리를 직접 청소하며 형성되었던 ‘우리 집’에 대한 애착이나, 가족 간의 협동을 통해 느꼈던 ‘정’과 같은 가치들도 대행서비스를 이용하며 생략되었다. 벌초 또한 부모가 묻히신 제 2의 집을 자식이 직접 정리하며 ‘효’를 행하는 것에 본래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를 남이 대신해준다니. 마치 효도까지 대행하는 모양새다.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운동화를 대신 빨아주지도, 세탁소에 맡겨주지도 말아야지. 적어도 몇 번 정도는, 작은 손으로 꼬물꼬물 운동화를 빨고 그 운동화를 신고 살금살금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빨래를 하느라 옷이 더러워져도, 피곤해서 숙제를 다 하지 못하고 잠들어도 꾸짖지 않아야겠다. 남에게 부탁하지 않고, 스스로 행하는 과정에서 얻게 될 가치를 빼앗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