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하
한국 영화를 이끄는 배우들의 모든 것을 연구하는 백은하 소장. 생경한 길을 걷는 그의 삶을 영화에 빗대자면 멜로 그 자체다.
“무슨 일을 하든 자기 일을 사랑하렴. 네가 어릴 때 영사실을 사랑했듯이.”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알프레도와 토토가 나눈 대화 중 일부다. 배우연구소 백은하 소장의 삶을 그린 영화를 두고 진행한 프라이빗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에서 문득 위의 대사가 떠올랐다. 한국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 전 칸 국제영화제 뒷이야기로 화제가 된 JTBC의 <톡파원 25시>와 300페이지에 걸쳐 배우 이병헌과 배두나의 연기를 깊이 있게 풀어낸 <배우 이병헌>·<배우 배두나>를 기억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참신하다고 소문난 영화 콘텐츠 중심에 백은하가 있다는 사실. 일찍이 영화에 푹 빠진 어린아이가 이제 우리나라 영화계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다니. <시네마 천국> 명장면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릴 때부터 ‘덕질’을 많이 했어요. <귀여운 반항아>의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첫사랑이에요. 신문과 잡지 스크랩은 기본이고, 3년가량 일기장에 외사랑 연서를 썼습니다. 김혜수 배우에게는 팬레터를 보냈어요. 시간이 흘러 <씨네21> 기자 시절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는데, 차마 팬심을 드러내지 못하겠더군요. 아무래도 일이 먼저였으니. 이후 <차이나타운>을 계기로 김혜수 배우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미처 부치지 못했던 빛바랜 편지를 보여드렸죠. 예전에는 팬레터를 배우 집으로 직접 보냈는데, 김혜수 배우가 옛 주소를 보더니 고맙다며 저를 꼭 안아주더라고요. 성공한 덕후가 이런 건가 싶었습니다.”
백은하를 대표하는 수식어를 꼽자면, ‘전천후 시네마 키드’가 아닐는지. 지난 23년 동안 연출을 제외하고 기자, 라디오 DJ, 심사위원, 예능 프로그램 패널, 저자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둘러싼 대부분의 일은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은하의 미쁨 포인트는 영화계 소식을 틀에 박힌 언어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톰 크루즈가 “의리!”를 외치도록 이끈 인터뷰는 여전히 기억에 선명하다. 그의 매력은 OTT 영화 프로그램과 책 면면에서도 담뿍 묻어난다. 왓챠의 ‘배우연구소’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배우라는 직업을 조명한 점이, <배우 배두나>는 공감 능력을 살펴보기 위해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로 배두나의 뇌 활동을 실험한 점이 인상적이다. 더욱이 <배우 이병헌>에서는 어떤 인터뷰어도 쉬이 꺼내지 못하는 흑역사를 화두로 던지기도. 이는 감독 의도, 쇼트의 미학 등을 주로 다루는 여느 영화 프로그램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성덕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제 글이 형용사의 총체로 다가왔어요. 배우를 향한 순애보가 개인적 감정에만 머무르는 것 같았거든요. 자연스레 대중과 명확한 언어로 소통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영국 유학길에 올랐어요. 1970년대 말부터 리차드 다이어(Richard Dyer)를 중심으로 시작된 학문인 ‘스타 스터디(Star Studies)’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스타 스터디는 배우를 하나의 시대적 기호로 보고, 왜 시대가 이 배우에 열광하는지에 중점을 둔 학문인데요. 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 자체에 집중하는 연구를 생각했습니다. 이때 조어한 것이 액톨로지(actorology)예요. 배우라는 특이한 종족을 이해하기 위해 학문적(양질의 데이터와 정밀한 보고서, 인터뷰 등)으로 접근했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일이라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어요.(웃음) 유학에서 돌아와 ‘백은하 배우연구소’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배우에 대해 파고들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액톨로지(배우학) 시리즈인 <배우 이병헌>·<배우 배두나>는 다소 건조해 보일 수도 있어요. 독자들을 설득해야 하니까요. 미사여구는 지양했어요. 칭찬의 근거는 구체적일수록 좋잖아요. 배우에게도 응원이 될 테고요. 그렇다고 모든 내용을 당근으로 구성하지는 않습니다. 배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지만,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글은 아니거든요.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려고 쓰는 글도 아니지만, 배우 눈치를 보면서 쓰는 글도 아니고요.”
액톨로지 시리즈 외에도 백은하는 ‘무주산골영화제’와 공동 기획한 차세대 배우 프로젝트 ‘넥스트 액터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그동안 고아성·박정민·안재홍·전여빈이 참여했다. 눈에 띄는 점은 액톨로지 시리즈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이병헌·배두나의 얼굴을, 넥스트 액터 시리즈는 네 명의 배우가 인상적 연기를 펼친 신(scene)의 스틸 사진을 표지로 사용했다는 것. 그렇다면 각각의 시리즈에 등장한 배우를 선정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결과물이 얼마만큼 기대되고 궁금한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대중 인지도와 상관없이, 경외든 애정이든 1년에 몇 번을 보더라도 매번 호기심을 갖게 되는? 어쩌면 제 취향에 맞는 배우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도록 책을 제작하죠. 배우를 정할 때 액톨로지 시리즈는 상징성을, 넥스트 액터 시리즈는 가능성을 우선시합니다. 기실 오늘날 한국 영화계는 제가 상상했던 미래가 아니에요. 한국 배우가 한국 감독과 한국말로 영화를 찍었는데, 전 세계가 열광할지 누가 예상했겠어요. 넥스트 액터 시리즈 주인공들이 20년 뒤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백은하가 집필한 <우리 시대 한국 배우> 첫 장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자신이 사랑하는 방법으로 말하는 백은하가 예쁘고 부럽다”라는 허문영 평론가의 추천사가 있다. 그토록 바라던 꿈을 품에 안은 사람에게 건네는 귀여운 질투심에 공감이 가는 건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능란하고 멋있게 하고픈 소망이 있어서일 테다. 백은하가 걸어온 지난한 길을 감히 예상할 수는 없지만, 한 분야에서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기까지 버틴 지구력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면 이렇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을 차곡차곡 담아온 그의 다음 신은 어떤 스토리로 펼쳐질까?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멜로 영화가 떠올라요. 사랑의 불나방이 주인공인 격정 멜로. 사랑이 이뤄질 거라고 믿지만, 동시에 실패할 수도 있음을 알고 뛰어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결론은 사랑의 방법을 찾은, 사랑의 언어를 찾은 해피엔딩이네요.(웃음) 물론 사랑을 찾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배우의 색다른 면모를 끌어내는 것이 제 소명이라면 소명이에요. 그들의 예술을 곡해하지 않고, 관객과 연결고리를 만드는 중간자 역할. 그리고 영화에 뒤따르는 찬사는 여전히 감독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어요. 저는 이게 불균형하다고 생각합니다. 합당하지 않다는 게 아니에요. ‘영화는 공동 작업인데 스포트라이트가 너무 한 곳만 비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가까워요.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영화 안에서 배우의 매력을 발견하고 기록하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제가 배우를 연구하듯, 앞으로 영화미술, 영화음악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누군가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202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