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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May 04. 2023

공연의 탄생

이현정

최근 화제의 작품이 하나같이 거쳐간 곳이 있으니, 바로 ‘LG아트센터’다. 그런 LG아트센터를 이끄는 제5대 극장장 이현정에게 공연과 함께하는 삶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해 물어보았다.


© 서승희


LG아트센터가 강서구 마곡에 문을 연 지 벌써 반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6개월 동안 숨 가쁘게 달려온 소감이 궁금합니다. 

정식 오픈은 10월이었지만, 이사는 작년 3월에 했어요. 준비 과정을 포함해 1년을 분주하게 보냈죠. 그동안 강서구에 공연장이 없었잖아요. 새로운 관객을 개발하는 일이 크나큰 도전으로 다가오더군요. 다행히 관객의 반응이 괜찮아 한시름 덜었습니다.(웃음) 그중 교육 프로그램의 인기가 높은 것이 인상적이에요.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공간에서 듣는 건축 강의, LG아트센터 공연과 연계한 문화 예술 이야기 등 현장과 함께 호흡한다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강남구 역삼동 시절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규모가 커졌어요. 역삼동은 1000석 규모의 단일 공연장이었는데, 마곡은 1335석의 LG SIGNATURE 홀과 365석 규모의 U+ 스테이지로 구성돼요. U+ 스테이지는 공연에 따라 좌석 배치를 바꿀 수 있는 소극장이에요. 이곳에선 주로 대극장 무대에 올리기 어려운 창작 공연을 실험합니다. 덕분에 복합 문화 공간으로서 공연 스펙트럼이 넓어졌어요.


오랜 시간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마곡에 공연장을 개관한다고 했을 때 마음이 어떠셨나요? 

처음 이전 계획이 논의된 건 10년 전이에요. 당시 마곡은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었죠. ‘관객이 이곳까지 방문할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더욱이 LG아트센터는 기획·대관 공연을 모두 진행하잖아요. 기획 공연은 자신 있었는데, 대관(주로 뮤지컬)에는 물음표가 붙었던 게 사실이에요. 뮤지컬이야말로 접근성이 매우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오픈과 함께 이러한 우려가 어느 정도 해소됐습니다. 첫 2개월 동안 펼쳐진 기획 공연과 이어서 막을 올린 뮤지컬 <영웅>의 유료 관객이 각각 83%와 85%를 기록했거든요. 좋은 공연엔 반드시 관객이 찾아온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비록 강서구 끝자락에 있으나, 서울 어디서든 도어 투 도어 1시간 이내에 공연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거예요.


건축을 안도 다다오에게 맡긴 점이 놀라웠어요. 반사율 조절을 못 하면 노출 콘크리트는 음향 문제를 일으킬 것 같거든요.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데, 안도 다다오는 건축 디자인만 했어요. 무대 시설은 공연장 전문 컨설턴트 TP(Theatre Projects)가 전담했고요. 소음과 울림은 로비에서만 미세하게 느껴질 거예요. 공연장 내부는 반사와 흡음을 고려해 설계했습니다. 발코니 디자인도요. 흔히 다목적 극장을 무목적 극장이라고 하죠. 모든 장르를 수용하려 하면 어떤 것도 수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무용·뮤지컬·연극·클래식은 각기 다른 음향 환경을 요구해요. 가령 클래식은 잔향이 충분해야 하고, 뮤지컬과 연극은 어느 정도 흡음이 돼야 대사가 뚜렷하게 들리거든요. LG아트센터는 다양한 음향 환경을 최적화하는 기술을 적용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1335석의 LG SIGNATURE 홀 © 배지훈


지금부터는 개인적인 질문을 드릴게요. 금융 투자사에서 클래식 기획사(크레디아)로 전직한 다음, 1년 6개월 후인 1996년 12월 LG아트센터 건설본부팀에 합류하셨습니다. 기획사라는 개념이 부족했던 세기말, 공연계로 뛰어든 계기가 무엇인가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나 싶어요. 부모님이 문화 예술을 사랑하시거든요. 게다가 네 자매 모두 공연 관련 일을 하고있어요. 큰언니는 피아노를 전공했고, 둘째 언니는 국문과 교수·연극평론가로, 동생은 조명 디자이너로 활동 중입니다. 어릴 때부터 공연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었어요. 방법을 몰라 일단 금융 투자사에 취직했던 거죠. 금세 이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웃음) 이후 크레디아를 거쳐 마침내 공연장에 둥지를 틀게 되었습니다.


역삼동 LG아트센터가 세워지기도 전에 입사해 26년째 근속 중이세요. 더욱이 한 회사에서 사원부터 차근차근 올라간 공연계 최초의 여성 기관장이고요. 이직이 잦은 공연계에서 한 회사와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제가 5대 대표인데, 역삼동 시절 첫날부터 지금까지 LG아트센터의 커다란 줄기는 흔들리지 않았어요. 초대 극장장인 김의준 대표님이 토대를 잘 다져놓은 덕분이죠. 그래서 소신 있게 일할 수 있었어요. 팀원들과 오랜 시간 손발을 맞춰 안정감도 있었고요. 공연계에서 이직이 잦은 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문화의 가치를 낮게 보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가장 부침이 심한 곳은 국공립 극장이에요. 2~3년에 한 번씩 기관장이 바뀌니까요. 전문가를 임명하는 일도 드물고. 제가 LG아트센터 대표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날, 많은 분이 기뻐해주셨는데요, 저는 개인에게 보내는 인사가 아닌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에 대한 축하라고 생각해요. 훗날 “전문성을 갖춘 사람은 역시 다르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그만큼 책임이 막중해졌어요.


공연기획팀장·공연사업국장을 맡으면서 ‘시즌제 도입’, ‘초대권 없는 공연’, ‘국내에서 쉬이 접하지 못했던 해외 공연 섭외’ 등 성과를 올렸습니다. 특히 초대권 없는 공연은 굉장히 파격적 선언이었어요. 오늘날 공연 문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김의준 대표님이 “초대권을 발행하기 시작하면 공연 문화가 황폐해진다. 우리는 국가 지원을 받지 않는 민간 극장인데 한두 명씩 무료 티켓을 주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래서 LG 회장님께 직접 티켓을 구매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흔쾌히 승인해주신 덕분에 LG아트센터를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어요. 더욱이 유료 관객이 늘어나려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잖아요. 이를 위해 1년 동안 계획한 프로그램 라인업을 공개해 판매하는 ‘시즌제’, 그중 취향에 따라 묶어 할인받는 ‘패키지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선호하는 자리에 앉으려면 직접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는 관람 문화가 형성된 듯해요. 돌이켜보니 모두 절박함에서 나온 기획이네요.(웃음)


파리 오페라 발레 ‘지젤’ © Studio AL


해외 공연 섭외도 인상적이에요. 2000년 3월 개관한 새내기 공연장에서 <오페라의 유령>을 7개월 동안 무대 위에 올렸으니까요. 이때의 과감한 선택은 ‘2002 한일 월드컵’ 기간 유일하게 매진된 공연, 국내 뮤지컬계에 돌풍을 일으킨 공연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도 이와 관련한 추억이 있어요. 저는 집에서 월드컵을 시청했고, 가족은 김소현 배우가 출연했던 공연을 감상했는데요. 당시 “공연장 관계자가 한국 경기 결과를 알려줬는데, 관객들이 난리가 났다”는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나네요.(웃음) 2000년대 초반부터 LG아트센터는 작품성 있는 해외 공연을 선보이는 유일무이한 공연장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공연을 선택하는 기준과 섭외 과정을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방대한 리서치를 합니다. 이후 저희와 잘 맞을 것 같은 공연에 구체적 자료를 요청해요. 공연 영상을 보고, 기술적 검토를 거친 뒤 재정적 조건을 살펴봅니다. 그중 한 해 기획 공연 라인업에 들어가는 건 30% 정도예요. 대관은 조금 다릅니다. 대관 가능한 날짜에 기획사가 공연 제안을 하면, 내부적으로 검토한 뒤 연락을 드려요. 라이선스 뮤지컬을 예로 들어 설명해볼게요. 공연 라이선스를 가진 쪽에서 가장 먼저 물어보는 건 공연장 유무예요. 미국과 영국에선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 극장을 잡는 일을 우선시하거든요. 아무리 좋은 공연이라도 공연장이 확보되지 않으면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오페라의 유령> 내한 공연을 검토할 당시 국공립 극장은 한 공연에 오랫동안 대관을 허락할 수 없는 환경이었어요. 극장 구조도 변경해야 했고요. 반면, 기획사는 수익을 남기려면 장기 공연이 필수였죠. LG아트센터가 새내기 공연장이라 이러한 장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얄 세익스피어 컴퍼니, 조수미, 피나 바우쉬가 공연을 했음에도 LG아트센터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 마케팅 목적으로 과감한 선택을 한 부분도 있고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2007)와 뮤지컬 <라카지> 초연(2012)을 감상한 날도 떠오릅니다. 등장인물·주제 등이 그때로서는 다소 파격적이었으니까요. 또 연극 <검은 수사>(2002) 때는 무대 장치를 위해 관객석을 130석으로 과감하게 줄였죠. 

다른 극장의 공연을 보면서 교과서에 없는 내용을 공연장에서 배우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어요. 제도권 안에서 배우지 못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 문화의 역할 아닐까요? LG아트센터가 공연을 선택하는 기준도 ‘다양성’이에요. 정치적·종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 아니라면, 여러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하려 합니다. 저희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요.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 JD Woo


다시 U+ 스테이지로 화제를 돌려볼게요. 공연 성격에 따라 좌석 배치를 자유자재로 변경할 수 있어 역삼동 때보다 실험적 작품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여요. 이곳을 어떻게 운영할 계획인가요? 

분명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작품인데 여건 탓에 지속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일을 왕왕 봤어요. ‘그들이 기획과 무대 기술, 홍보 마케팅 등을 지원받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LG아트센터와 함께 그들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자는 취지로 ‘CREATOR’s BOX’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습니다. 안무·연출·무대 디자인·음향 디자인과 상관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서로 발전시키는 플랫폼이 되었으면 해요. 이는 U+ 스테이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에요. 더불어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공연은 대부분 소극장 위주이기에 대극장에 창작 작품을 올리려면 리스크를 안아야 합니다. U+ 스테이지를 거쳐 대극장 무대로 옮겨가는 사례가 많이 나왔으면 해요.


기업이 비영리 문화법인을 운영한다는 것은 관객에겐 고마운 일이지만, 실무자로서는 부담이 될 것 같습니다. CSR 활동임에도 수입과 지출 차이가 크면, 문화 예술 활동에 대한 당위성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마지막으로 LG아트센터 기조를 유지하기 위한 센터장님만의 방향성이 궁금합니다. 

기업에는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줘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비영리 공익법인이 존재하는 이유죠. 만약 LG가 수익에 연연했다면 공연장 자체를 운영하지 않았을 거예요. 여러 매체에서 재정 자립도를 언급하는데, 사실 큰 의미는 없습니다. 20억 원을 써서 10억 원을 버는 것과 200억 원을 써서 100억 원을 버는 것 모두 수치상으론 똑같이 50%니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공연장 규모가 커질수록 지출 비용이 늘어나는 만큼 마이너스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그렇다고 재정 상황을 등한시하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모기업과 정해놓은 가이드라인 안에서 최대한의 퍼포먼스를 끌어내기 위해 최고 공연을 기획할 것입니다. 여기서 최대한의 퍼포먼스는 공연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LG아트센터가 공연을 통해 생산해낸 가치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켜봐주시기 바랍니다. [2023.05]


365석 규모의 U+ 스테이지 © 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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