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신지혜 ×영화제작자 강혜정
우리나라 영화계를 이끄는 맏언니로 신지혜와 강혜정을 꼽고 싶다. 전 아나운서이자 작가 신지혜는 25년 동안 청아하면서 여운이 짙은 목소리로 영화음악을 청취자에게 선물했고, 영화사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는 20년 넘게 한국 사회를 날카롭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영화를 선보이고 있다. 이들을 보노라면, “내가 막힌 길을 뚫을 수 있어!”라고 외치는 영화 <밀수> 속 춘자가 떠오른다. 솔직하고, 의리가 넘치며, 화끈하다. 또 대화를 나누면, 그 바탕에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는 영화라는 험난한 길을 묵묵히 헤치고 올 수 있었던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진리이자 원동력이 아닐는지. 어느새 좋아하는 일을 하겠노라 호기롭게 영화계에 뛰어든 시절은 훌쩍 지나갔지만, 그들이 지나온, 그리고 지나갈 길은 시네마 키드의 영원한 플레이리스트와 필모그래피로 남을 것이다.
"일대일로 위로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물끄러미 젖는다고 할까요. 아마 30대 후반쯤일 거예요. 운전하던 중 <신지혜의 영화음악>에서 사연과 함께 <화양연화> ‘유메지의 테마’가 나왔는데,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펑펑 울었어요. 그런데 속은 개운해지더라고요." _ 강혜정
작년 겨울, 신지혜 작가님은 <신지혜의 영화음악> 25년의 여정을 멈췄고, 강혜정 대표님은 영화 <밀수>로 청룡영화상 5관왕에 올랐습니다. 계절이 바뀐 요즘 두 분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특히 신 작가님은 라디오 마지막 날 “도비는 자유예요”라는 클로징 멘트를 하셨죠.
(신지혜) 긴 겨울잠을 자려고 했는데, 벌써 계절이 바뀌었네요. 그동안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 같은 영화 행사를 진행했고, 책도 출판했으며, 미술과 영화 칼럼도 썼어요. 재직 기간에도 비슷한 일을 했지만, 프리랜서는 제약이 없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일의 양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변하지 않은 점은 영화에 작은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즐겁게 일한다는 거예요.
(강혜정) 아까 잠시 촬영을 멈춘 시간에 최근 젊은 감독들 작품을 연달아 공개하는 게 외유내강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것과 연관이 있느냐고 물어보셨잖아요. 그건 아니고, 단지 재미있게 영화를 제작하려는 것뿐이에요. 류승완 감독은 류 감독대로, 또 다른 젊은 감독들은 그들 나름대로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가끔 후배들에게 “난 80세에도 영화제에서 수상 소감 발표할 거야”라고 농담을 하는데요. 당연히 그들은 야유하지만, 즐겁게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근황이라면 새롭고 흥미로운 시나리오를 찾는다는 것. 신인 감독, 신인 작가와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꼭 써주세요.(웃음)
두 분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강혜정) 류승완 감독의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신영음(<신지혜의 영화음악>)’에 소개되면서요. 시간이 지날수록 신 작가가 경이롭게 다가왔습니다. 1998년 2월 2일 첫 방송부터 한결같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게 참 고마웠죠. 그래서 아직 헤어질 결심을 못 했어요. 필름 영화를 떠나보낸 데서 오는 향수, 후회와 비슷한 감정이지만, 너무 애쓴 사실을 알기에 그녀의 넥스트 챕터를 열렬히 응원하려고요.
(신지혜) 류 감독을 처음 만난 날 반짝이던 눈빛이 여전히 잊히지 않아요. <고무 인간의 최후>, <토마토 특공대>를 신이 나서 설명하는데,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찐’이라는 걸 단번에 알겠더라고요. 이후 자연스럽게 그의 멋진 동료이자 동반자인 강 대표를 만나게 됐습니다. 강 대표는 외유내강 그 자체예요. 우리 같은 ‘냉미녀’ 스타일은 보기와 달리 마음이 약하잖아.(웃음)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급속도로 친해졌어요.
"매일 똑같은 시간에 기획·연출·진행을 할 수 있었던 건 애청자들 덕분이에요. 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고, 안부를 보내주시니 <신지혜의 영화음악>을 둘러싼 하나하나에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죠. 오랜 시간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에요." _ 신지혜
서로의 관계에서 주고받은 긍정 에너지가 궁금합니다.
(강혜정) 영화인들에게 신 작가님은 ‘온리 원 큰 언니’예요. 영화의 장단점을 모두 알면서도 장점을 부각해주니 응원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미디어가 디지털 환경으로 바뀌면서 영화를 심도 있게 다루는 콘텐츠가 줄었잖아요. 주로 가십이나 흥망성쇠에 초점을 맞춰서 아쉬웠는데, ‘신영음’이 큰 힘이 됐죠. 전문성을 갖춘 것은 물론, 대중적이지 않은 영화에도 관심을 두게 했거든요. 동료들과 만든 영화가 성과를 내는 건 엄청난 희열이지만, 딜레마도 있어요. 아무리 멋있는 영화라도 화제가 안 되면 금세 잊히고, 그러면 다음을 기약하지 못하는….
(신지혜) 청소년 시기, 영화를 보며 내가 영화감독을 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더 많은 영화를 보니까 함부로 까불면 안 되는 분야더군요. 영화는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잖아요. 깊이 반성했죠. 의도적으로 칭찬하지는 않더라도, 영화인을 향한 ‘리스펙’은 잊지 말아야겠다고 은연중에 가슴에 새긴 것 같습니다. 그런 영화계를 이끄는 존경하는 강혜정 대표와 이번 촬영을 함께해서 뿌듯해요.
강혜정과 신지혜를 영화음악이나 영화 캐릭터에 빗댄다면?
(신지혜) <알렉산더>에 나온 ‘(Eternal Alexander)’. 반젤리스(Vangelis)의 곡인데 굉장히 웅장해요. 그리고 한재권 감독의 음악. 음향공학을 전공해서 그런지 한 감독의 곡은 건축물을 쌓아 올리는 듯한 짜임새가 있어요. 마치 강혜정 대표가 걸어온 길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강혜정) <밀수>에서 김혜수 배우가 연기한 조춘자.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걸어온 길이 쉽지 않고, 강단과 의리가 있으며, 무엇보다 섹시하다는 것. 라디오에서 목소리만 듣다가 신 작가님을 직접 만나면 오라에 놀라실 거예요.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그렇지 우리, 젊었을 땐 괜찮았잖아.(웃음)
[202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