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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Mar 05. 2018

패션에 한국의 미를 덧대다

구본창

남자 흑백 누드사진을 실로 꿰매 완성시킨 <태초에> 시리즈 같은 실험적인 작업부터 한국의 전통 예술과 문화를 섬세하게 다룬 <탈> 시리즈, <백자>와 <비누> 시리즈 같은 세련미가 돋보이는 작업까지. 그의 사진은 상당히 한국적이다. 순수 사진가라는 인식이 강한 구본창이지만 실제로 그는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진가다. 특히 그가 패션지 <VOGUE>와 오랜 시간 작업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치 하나의 연작을 보는 것처럼 그의 패션 사진에는 한국적인 미와 아련함, 다소곳함 등이 점철되어 있다.

구본창의 시선과 손길이 닿은 것은 늘 독특한 분위기로 재탄생된다. 그런데 그 독특한 분위기라는 것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다양한 층위의 느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찮은 사물일지라도 그가 찍은 사진에선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함과 어떤 사연이 있는 듯한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것을 과감하게 배제한 사진은 그것이 아무리 간결하고 단순할지라도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Vogue 2002.12.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모델 장경란. 헤어 김정한. 메이크업 고원혜


순수사진작가라는 인식이 강하다. 패션 사진을 촬영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독일 유학에서 돌아왔을 때 당시 나보다 1년 먼저 한국에 들어와 에스콰이어 구두를 촬영하고 있던 중앙대 김영수 교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에스콰이어 측에서 모델이 들어간 구두 촬영을 요청했는데, 그것을 해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브랜드와 인연을 맺게 되었고, 1988년 ‘비아트’라는 브랜드가 론칭하면서 패션 촬영을 맡게 됐다.


섬유업에 종사하는 선친의 영향도 있었다고 들었다.

아버지 덕분에 다양한 섬유와 접할 기회가 많았다. 엄마나 누나들이 다양한 천 소재를 갖고 작업할 때 옆에서 눈여겨보기도 했다. 아버지께선 일본 패션 달력도 종종 갖고 왔는데, 사진이 너무 멋있어서 수집도 했었다. 아타카라는 패션 달력을 아직도 갖고 있을 정도다.


구본창 패션 사진의 특징은 한국적인 것을 가장 잘 표현한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나?

1985년 일본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사진가 호소에 에이코가 내게 소개해줄 것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나라 민화를 집대성한 책이었다.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민화가 아름답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책을 보면서 한국적인 요소에 대해 크게 자극을 받았다. 아니 쇼크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는 이런 것들을 사진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패션 사진에 한국적인 요소들을 반영한 것은 이영희 디자이너와 한복 촬영을 진행하면서부터다. 한겨울 경주 양동마을에서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 꼬마들을 모델과 함께 연출해서 찍었다. 신윤복의 회화 같은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Vogue 2016.05.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모델 이지. 헤어 김선희. 메이크업 박혜령


한국적인 배경을 이용하는 것도 이 때문인가?

일단 스튜디오 회색 배경 앞에서의 촬영은 재미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섬유에 관심이 많았던 탓인지 자연스레 천으로 눈길을 돌리게 됐다. 가능하면 무명이나 삼베 같은 것을 사용하려고 했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섬유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아서 직접 천을 사다가 물을 들이기도 했다. 길을 가다가 독특한 색이나 무늬가 있는 천을 발견하면 가던 길을 되돌아갔던 적도 많다. 여행 갔을 때 기념품 가게에서 햇빛을 가리던 천이 마음에 들어 주인에게 사정해서 구입한 적도 있고, 건축자재 판매점 앞에서 모래를 덮어 놓았던 천에 이끌려 그것을 구입한 경험도 있다. 


작가가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단아하고 다소곳한 것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를 위해 퇴색한 빛을 내려고 노력한다. 색동 같이 화려한 것들도 내 사진에선 한 꺼풀 가라앉는다. 


최근의 패션 사진을 보면 천편일률적인 느낌이 든다는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패션잡지에 게재된 사진이 한 명의 작가가 촬영한 것처럼 다 똑같아 보인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나만의 색깔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어빙 펜, 데이비드 라샤펠, 파울로 로베르시, 피터 린드버그 같은 작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색이 있지 않은가. 내 사진에선 멜랑콜리와 어딘가 사연이 있는 것 같은 아련함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내가 가진 나만의 감성이 작업에 투영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Vogue 2016.01.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모델 수주. 헤어 김정한. 메이크업 원조연


사진을 보면 시선 집중을 위해 불필요한 요소들을 배제하는 미니멀리즘적인 성격이 강하다. 

‘Less is more(적을수록 좋다)’는 말을 항상 염두에 둔다. 촬영에서도 군더더기를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독일 유학의 영향이다. 독일은 불필요한 데코레이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피사체의 본질을 아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가가 보여주려는 것에 시선을 집중시키려면, 무엇보다 간결함을 유지해야만 한다.


개인작업처럼 패션 사진 역시 연작의 연장선에서 봐도 괜찮을까?

패션 사진은 매번 옷과 모델, 배경이 달라지고 단발 촬영이 주를 이루니 연속성을 갖기가 어렵다.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서 작업이 모이면 연작으로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내 패션 사진의 경우 1980년대 사진과 지금 사진의 분위기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는 여자의 모습, 기다림과 아련함이 시대를 관통하는 것 같다. 


순수 사진가가 상업사진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

순수예술작품이든 패션이든 대중과 같이 호흡할 수 있다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통해 대중한테 즐거움을 주고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술사진과 상업사진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후배 사진가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면?

상업사진을 하다가 뒤늦게 순수사진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만약 의욕이 있다면 일찍부터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개인작업에도 100%의 노력을, 상업사진에도 100%의 노력을 해야 한다. 상업사진 하면서 따로 개인작업을 치열하게 하면 다행이지만, 많은 사진가들이 그대로 주저앉는다. 시안대로 따라가는 일에 치이니 몸도 힘들고, 더 이상 아이디어도 나오지 않는다. 개인작업을 해야 할 사람인데 그대로 상업사진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Vogue 2013.01,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모델 이혜정, 헤어 김정한, 메이크업 박혜령


우리나라 패션 사진의 패러다임이 바뀌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서구 지향적으로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패션 사진이 단번에 바뀔 수 있겠나. 한국적인 패션 사진은 한국적인 소재와 선으로 옷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라고 해서 무조건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내 사진으로 젊은 친구들에게 자극을 주고 싶다. 또 이런 사진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요즘 잡지를 넘겨보면 사진 자체에서 사진가의 개성이 전혀 드러나질 않는다. 책을 넘기다가 ‘이 사진은 누가 찍었지?’ 하며 들여다볼 수 있는 사진가가 등장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서구적이든, 한국적이든 일단 독특한 시선을 가진 사진가였으면 좋겠다. 그도 한국 사람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한국적인 철학과 문화가 깃든 사진이 나올 것이다. 


예전 ‘워크숍 9’처럼 패션 사진가의 작업을 알릴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헬무튼 뉴튼도 깊이 있는 패션 사진가이지만 그의 작품이 컬렉션 되고 미술관에 등장한 것은 불과 10년밖에 안 된다. 닉 나이트도 최근에서야 개인작업을 발표하고 인정받고 있다. 이를 보면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한국 패션 사진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 같다. 최근 패션 작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시 비중이 아쉽긴 하지만 이번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만 하더라도 고무적인 일 아닌가. 계속해서 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패션 사진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날을 대비해서 지금부터 전시 내용이나 보여주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20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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