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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은 Jan 24. 2021

시골이 뭐가 좋아서 시골살이 준비 중 1편

곧 5촌 2도

시골생활을 꿈꾼 게 언제부터였을까.. 너른 마당과 푸르른 들판의 일부가 되어 자연이 주는 만큼만 먹고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만 쓰는 삶. 그것이 무척 근사하게 느껴진 게 언제부터였을까.

  “도시는 지긋지긋해. 시골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어”

 나는 몇 년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처음에 나는 패배감에 짓눌려 만만한 시골로 퇴장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도시에는 열등감에 시달릴 요소들 너무 많으니까. 그러나 지긋지긋하다 말할 만큼 열정적으로 살기나 했던가.. 패배라 말할 만큼 치열하게 살기나 했던가..  나는 왜 시골을 꿈꾸게 되었을까.




 언젠가 한번 그런 적이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는 헤드라이트 불빛 따라 시골길을 달려가는데 무슨 일이었는지 차에서 잠시 내리게 되었다. 괜히 허리를 돌려가며 몸을 풀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이럴 수가! 촘촘히 박힌 별들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콩자반에 깨소금 쏟은 듯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데 살면 좋겠다”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다시 차에 올라 한참을 달리다가 희미한 불빛이 세어 나오는 집들을 보며 “이렇게 어둡고 외딴곳에 살면 무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다.

 거의 모든 삶을 도시에서 산 나에게 시골은 그런 곳이었다. 황홀하면서도 무서운 곳. 아름다운 풍경은 탐나지만 칠흑 같은 어둠과 벌레는 두렵기만 한 곳.


 시골을 생각하면 늘 전제에 “언젠가는”이 붙었다. 먼 미래 언젠가는..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언젠가’를 당겨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첫째를 낳고 한살림에 가입하면서 유기농, 친환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연친화적인 생태 육아법을 배우게 되었다. 사실 생태 육아법이라는 게 특별한 것은 아니고 아이들을 자연 속에 실컷 놀게 내버려 두는 것인데 추운 날에 감기 걸릴까 두려워 않고 옷에 흙 묻고 손톱에 시커먼 때가 끼는걸 자연스럽게 여기는 방식이다.

 어느 날인가 봄 새싹이 돋아나는 중에 하루 매섭게 추운 날이었다. 평소 뜻이 잘 맞아 어울리던 한살림 엄마들과 경주까지 나들이를 갔다가 너무 추워서 아이들을 군불 떼는 방으로 몰아넣고 우리도 몸을 녹이며 얘기를 나누는데, 한 엄마가 “우리는 문센은 안 다니지만 자연을 사교육 시키고 있는 거죠” 하는 것이다.

 “자연 사교육?”

  나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학습의 대상으로 삼은 적은 없으나 풀포기 고운 흙을 찾아 추운 날 경주까지 달려간 정성은 사교육이 아니고 무엇일까? 동시에 나는 아이에게 자연을 보여주고 체험시키는 일이 문화센터에 다니는 것보다 우월하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아이에게 무언가 가르치려 하고 엄마는 바람 쐬고 싶은 심리는 문화센터를 다니는 엄마들과 같은데 육아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실수고 오만이었다.

 무엇보다 충격은 도시 아파트에 사는 우리 가족 주변엔 내 아이를 풀어놓을 자연이 없어서 늘 탄소발자국을 남기며 수풀을 찾아다녀야만 하니 내가 추구하는 자연주의 생태 육아는 언제나 사교육의 바운더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손바닥만 한 마당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파트에 사는 답답함을 처음 느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우리 부부는 마당 있는 주택을 알아봤지만 허사였다. 도시 근교에 집을 지을 요량으로 땅을 알아보러도 다녔지만 매번 허탕이었다. 남편의 직장 가까운 곳에는 주택지가 아예 없었고 직장에서 멀리 벗어나면 교육기관이 마땅치 않았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애를 써봤는데 남편과 아이의 출퇴근이 만만치 않아 포기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우리는 집 근처 민간어린이집에 첫째를 입학시켰고 나의 시골 드림은 풀이 꺾였다.


 그러다 다시 시골행에 불을 지른 건 친구 부부가 귀농귀촌을 실현하면서부터다. 친구네 딸과 우리 아이가 영혼의 단짝이기도 한 탓에 자주 친구네 집에 놀러 가곤 했다. 2시간을 넘게 고속도로 운전을 해야 했고 하룻밤 이상 친구 집에 묵어야 하는 민폐를 끼쳤지만 그럼에도 시골에 가는 게 너무 좋았다. 친구 부부의 삶을 보며 우리 부부도 그 주변에 자리를 잡았으면 하고 자꾸만 바라게 되었다.

 내가 하도 바라고 조르니 완벽한 도시남자인 남편도 흔들려서 시골에 일자리를 알아보기에 이르렀다. 나는 더욱 신이 나서 집 지을 땅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소개받는 족족 토지대장을 떼어보고 용도변경 시 비용, 토목공사 시 비용을 계산해보며 머릿속으로 수 없이 많은 설계도를 그렸다. 실제 설계사님을 만나 상담을 하기도 하며 시골행의 윤곽을 잡아나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남편을 만족시킬 일자리가 없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땅도 없었다. 시골의 문턱이 이렇게 높을 줄이야... 그렇게 다시 한번 시골행이 좌절되는 듯했다.


 '결국 우리 자리는 도시인가 보다.'

 도시 사람들은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 뭐'하며 쉽게 쉽게 시골살이를 말한다.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너른 들판이 늘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어림없는 소리. 땅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늘 울적해졌다.

 가만 생각해보면 나의 간절한 바람에 시골분들은 땅을 알아봐 주시느라 애쓰시고 남편은 아내의 붕 뜬 마음에 희생을 각오하고 었었다.

 '되는 일이라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될 것이다. 애쓰고 희생해서 억지로 만들어지는 일은 그에 따른 과보가 있을 것이다. 시골에 가고 싶은 마음은 나의 욕심이고 집착이구나.'

 마침 정토회 불교대학 졸업식이 있던 날. 나는 완전히 마음을 비웠다. 호계 자세를 하고 향불을 팔에 살짝 찍는 연비를 하는데 찰나의 따끔함과 동시에 내 안에 쌓였던 욕심이 뻥하고 터져버림을 느꼈다. 불대는 다니지만 나는 무교, 불교적 의식행위가 싫어서 경전반 진학은 하지 않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경전반 입학 원서를 썼다. 내가 알고 있던 종교도 관념, 관념론을 부정하는 생각도 관념임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욕심과 집착을 탁 놓아버리기 위해 조금 더 공부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경전반에 진학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되었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와 빨래를 하는데 시골에서 연락이 왔다.

 '정말 괜찮은 땅이 나왔어!'

 욕심과 집착에서 놓여난 해방감과 청량함을 느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의 가슴은 다시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 2편도 꼭 봐주세요:)


#시골살이 #시골유학 #귀농귀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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