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30. 기회주의적 영어공부...(2부)
노래 가사 읽기 연습을 하다가, 언뜻 예전에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배철수 선생이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카피(Copy) 음악’를 많이 했다고 한다.
당시 유명했던 서양 밴드들의 노래를 진짜 원곡과 똑같이 부르는 것을 ‘카피한다’라고 했는데
자기들을 ‘카피 밴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는 가사를 정확히 몰라서 노래를 들으면서
그 영어 가사를 한글로 받아 적어서 코드를 따고 노래를 불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이 생각나자 “내가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단 영어 노랫말 밑에 내가 알고 있는 영어 발음을 한글로 적었다.
그리고 노래를 들으며 내가 한글로 적은 영어 노랫말 따라 읽어 봤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영어 소리(발음)와 노래에서 들리는 소리(발음)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이번에는 귀로만 노래를 들으면서 단어는 생각지 않고 들리는 발음과 가장 비슷한 소리를
한글로 적어봤다. 이렇게 해 보니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영어 발음과 실제로 들리는 소리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예를 들어, 노래가 처음으로 빨라지는 이 부분을 영어 가사를 보면서 한글로 적었을 때는
and I’m never gonna tell you everything I’ve got to tell you but I know I’ve got to give it a try
(앤 아임네벌 고나 텔유 에브리싱 아이브갓어 투텔유 벗 아이노우 아이브 갓어 두 기브잇어 트라이)
이랬는데,
실제로 노래에서 들리는 발음은 이랬다.
and I’m never gonna tell you everything I’ve got to tell you but I know I’ve got to give it a try
(아남 네벌고나 텔유 에브리싱아이고나 텔유버라이 노아이고나 기비러츄라이)
귀로 듣고 받아 적은 가사를 마이클 선생의 말대로 반복해서 큰 소리로 읽어 봤다.
몇 번 안 읽었는데도 의외로 문장들이 술술 읽혔다. 그리고 읽기를 계속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저절로 읽기가 노래로 변해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와우!!”
나는 내 입에서 나오는 그 노랫소리에 내가 놀랐다.
“어라??? 되네!!! 앗싸!!!” 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흥분이 올라오면서 가슴이 쿵덕쿵덕 뛰었다.
그래서 그다음으로 빨라지는 이 부분도 똑같이 해봤다.
I know all the rules and then I know how to break ’em and I always know the name of the game.
(아노올더 룰~스애나 노하투브레~큼애나 올웨노더 네몹더게임)
이 부분은 평소에 많이 불러보지 않은 부분이라 생소했지만, 이것도 조금만 하면 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앞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뭔가 길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주 동안 그렇게도 안되던 것이 몇 시간 만에 두 문장을 거의 따라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영어 발음과 실제의 발음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귀에 들리는 소리와 입으로 내는 소리가 다르니 당연히 빠른 말은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마이클이나 다른 선생들은 한국사람 귀에 영어가 어떻게 들리는 지를 모른다.
그러니 영어에 익숙한 자기들 방식으로 말이든 노래든 영어를 가르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귀에는 영어가 한글화 되어 들린다.
그러니 우리가 듣는 소리와 그들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애당초 달랐던 것이다.
그날 한글로 귀에 의존해 노래를 받아 적으면서 겨우 이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이제야 이 사실을 깨닫게 되다니...." 이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일단 노래를 들리는 소리에 최대한 가깝게 한글로 받아 적었다.
영어 노래를 한글로 적어놓고 보면 정말 이상한 외계어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글로 쓴 영어 소리를 크게 읽으면 영어 문장이 된다.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영어 노랫말을 한글로 받아 적은걸 눈으로 읽을 때는 알 수 없는 외계어 같지만 문장을 입으로 읽으면
올바른 영어 어휘와 문장이 되는 것이었다. 이건 정말 새로운 세계였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영어 수업시간에 소리 내서 영어를 읽지 못하던 아이들은 한글로 영어 독음을
교과서에 적곤 했었다. 물론 선생에게 걸리면 가차 없이 혼쭐이 났다. 내가 다닌 학교의 영어 선생들은
본인들도 이상하게 발음하면서 학생들이 또박또박 영어 단어를 못 읽으면 가차 없이 매를 날렸다.
당시 선생들의 매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때문에 영어에 진저리를 치는 학생들이 많았고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그 시절의 영어 수업은 정말 지옥 같았다. 어쨌든,
나는 다음 날 일과가 끝나고 마이클 선생을 찾아가서 내가 완성한 부분을 들려줬다.
마이클이 눈이 동그래지면서 “Wow, great!!”한다.
나는 “네가 하라는 대로 했더니 잘 됐어”라고 하고는 내방으로 돌아왔다.
물론 일부분은 맞고 일부분은 틀린 말이다. 어쨌든 마이클의 충고에 따라 노래에 신경
쓰지 않고 가사 읽기를 시작한 것이 해법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됐으니 마이클에게도
공이 있는 건 사실이다.
노래를 잘 부른다고 발음이 좋아질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노래 부르기를 하니
적어도 문장의 발음들이 어떤 연관을 지으며 흘러가는지는 조금은 알게 됐다.
영어 공부를 하면서 처음으로 스스로 뭔가를 깨달은 기분이 들었다.
빨리 흘러가는 가사 속에서도 ‘제이알’의 말처럼 모음의 장단음은 분명하게 구분된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 됐다. 모든 발음을 흉내 낼 수는 없지만 언뜻언뜻 떠오르는 중요한
단어들이라도 조금씩 신경 써주면 발음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한글로 써놓은 가사들을 보고 있으니 내가 너무 기회주의적으로 보였다.
목표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내 몸속에는 아직도 과거 영어 선생님들이 심어놓은 또박또박
잉글리시의 DNA가 남아서일 것이다. 하지만 난 내 방법이 틀렸다는 생각이 않는다.
공부를 기회주의적으로 하면 어떤가?
“공부는 시험이 아니다.”
평생을 시험 치는 공부만 하며 살다 보니 자꾸 '공부'와 '시험'을 헷갈리게 된다.
한글로 가사 써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영어공부에 도움이 된다면 이 방법을 쓰는 것이 맞다.
공부에 정해진 길이 있다는 틀에 갇힌 교육을 너무 오래 받았다.
그래서 정해진 길을 벗어나서 무엇을 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다.
지금이라도 그걸 해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제니스 선생에게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여기까지 왔지만 후회는 없다.
어렵더라도 약속을 했으니 끝까지 해 볼 작정이다.
약속은 타인과 했지만 승부는 자신과 해야 하는 묘한 지점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과정이 꽤나 즐겁다.
노래의 첫 두 소절이 완성되던 날 노트에 이렇게 썼다.
"방향은 맞는 것 같다.
길을 찾은 것이다.
이제 달리기만 하면 된다.
시간은 부족하지 않다.
내겐 아직 충분한 시간이 있다.
나이가 조금 많을 뿐이지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나는 전에 책상 앞에 붙였다가 지금은 떼 버린 메모지를 서랍에서 찾았다.
그리고 테이프로 다시 붙였다.
** 통찰(洞察) : 예리한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봄.
흔히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데,
맞는 말이지만 방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찰’이다.
‘통찰’을 못하면 방향을 상실한다.
그래서 지금은 방향보다 ‘통찰’ 해야 한다.
‘통찰’하고 방향을 잡으면 속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최윤식- 대담한 미래 2.. 중 발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