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회주의적 영어공부 01

(1부) "말은 쉽지!!"

by 벼랑끝

[마흔 살에 떠나는 필리핀(Cebu) 어학연수 이야기]

#29. 기회주의적 영어공부...(1부)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서 마이클 선생과 자주 어울리게 됐다.

마이클은 커피를 좋아했다. 마이클도 역시 커피를 좋아했는데 여느 필리핀 사람처럼

주로 “3 in 1” 커피를 마셨다. "3 in 1" 커피는 우리나라로 치면 커피 믹스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필리핀에서 파는 믹스 커피는 한국 커피 믹스 보다 훨씬 달고 진하다. 머그컵에 물을

가득 채워야 우리나라 자판기 커피 맛이 난다.


한국의 자판기 커피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루 한 잔 정도는 마셨었는데 그걸

생각해서 여기 믹스커피를 마셨다가는 절반도 못 마신다. 일단 농도 조절이 어렵고 재수 좋게

잘 맞춰도 맛이나 향이 영 별로다. 종류가 많아 이것저것 사서 마셔봤지만 그다지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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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에 있을 때 커피를 꽤 즐기는 편이었다.

주로 원두커피를 내려 마셨는데 세부에 오고 난 후로 커피 내리기가 쉽지 않아 아쉬운 점이 많았다.

아침에 식당에 가면 커피 메이커에 커피가 한가득 내려져 있어서 텀블러 두 개에 가득 받아서

하루 종일 들고 다니면서 마셨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세부로 올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커피와 필터를 모두 챙겨 왔지만 공부 스트레스와 귀차니즘으로

커피는 몇 달 동안 내 가방에서 처박혀 잠만 자고 있었다. 그런데 학원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자

슬슬 커피 생각이 났다. 가방 속의 커피는 오래됐지만 마시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주말에 마이클 선생의 방에서 놀다가 커피 메이커를 발견했다.

졸업생이 선물한 것 같은데 마이클 선생은 그걸 박스 포장도 뜯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원두커피를 마실 만큼 마이클의 수입은 풍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는 커피와 필터를 가져가서 마이클에게 원두커피 좋아하냐고 물었다.

"Of course"라고 대답한다.

그날 나는 내 방에 있던 커피를 모두 마이클의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방과 후나 주말이면 마이클과 함께 커피를 내려 마시며 수시로 티타임을 가졌다.

마이클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나는 주말이면 지하의 마이마이에게 내려가서 수다를 떨거나 마이클 선생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마이클은 주말에도 학원에 있을 때가 많았다. 집이 불편하다고 했다.

마이클은 가끔 평일에도 수업이 끝나면 내 방에 찾아와서 티타임을 가지자고 할 때가 있었다.

그는 내가 없을 때는 절대 커피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커피 생각이 날 때면 날 찾아다녔다.


마이클은 발음을 담당하고 있는 선생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와 대화를 하면 의외로 말이 잘 들렸다.

학생들 말로는 학원 선생들은 알아듣기 쉬운 말만 써서 그렇다고 하는데 어쨌든 나는 마이클과 대화가

차라리 다른 선생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쉽게 느껴졌다. 마이클과 가까워지고 난 후 처음으로 1:4 수업에

마이클의 수업을 추가해야겠다는 고민을 하게 됐다.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선생을 바꾼 적이 없었다. 내가 선생을 바꾸지 않아도 학생들이 자주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과 수업을 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매니저가 왜 선생 안 바꾸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때 나는 실력이 늘지 않는 것은 ‘나’의 문제지 ‘선생’의 탓은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내 말을 듣더니

매니저가 선생을 너무 안 바꾸는 것도 좋지만은 않다는 충고를 했었다.


며칠 고민을 하다가 1:4 수업 하나를 마이클 수업으로 옮기고 싶다고 학원 사무실에 이야기했더니 마이클

수업은 대기자가 많아서 좀 기다려야 할 거 같다고 답을 했다. 필리핀 어학연수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받는 ‘발음’ 문제가 마이클과 수업을 하면 이부 해소될 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많은 학생들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이클 수업의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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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내가 “Making love out of nothing at all” 노래가 정말 안 된다고 하자 마이클이 같이

노래를 불러준다. 마이클은 원곡과 비슷할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나는 왜 이렇게 혀가 못 쫓아가냐고 했더니 마이클은 내가 많이 읽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려 하지 말고 일단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루에 100번만 읽으면 저절로

될 것이라고 마이클이 웃으며 말을 했다. 나는 속으로 "말은 쉽지!!" 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처음부터 기타를 들고 자꾸 노래를 부르려고 했었다.

듣고 부르고 듣고 부르고를 반복했는데 지금까지는 별로 효과가 없었다.

노래의 도입부는 어떻게 따라 부를 수 있었지만 빨라지는 부분은 도저히 흉내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마이클의 조언에 따라 노래를 부르지 않고 일단 가사만 소리 내서 읽어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많이 듣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가사 읽기가 제대로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날 밤 진짜 100번을 읽겠다는 생각으로 반복해서 계속 소리 내서 읽었다.


다음 날 일과가 끝나고 다시 노래 가사와 씨름을 했다. 전날 그렇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입 속에서

버벅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며칠을 계속해도 나아지는 것 같지가 않아 1:1 제니스 선생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그녀도 그냥 듣고 따라 부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만 했다.

나는 벽에 부딪힌 느낌을 실감했고 점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니스 선생은 좀 쉬운 노래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지만 이미 승부욕이 발동한 상태에서 포기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중, 드디어 그날이 왔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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