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부 시작)
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그간 글을 쓰지 못한 것은 심적으로 불안해서였다.
팬 끝 한 번 잘못 놀렸다가 멘탈이 반신불수가 될 정도의 충격을 받았는데 이게 쉽게 회복되지가 않았다.
한동안 반성의 시간을 가진 것까지는 좋았는데 자책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타이핑하는 것이
귀찮아져 버렸다.
이럴 때면 뇌까리는 말이 있다.
"이깟 글 써서 뭐 하게..."
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글쓰기는 볼장 다 본 거다.
사고 자체가 글쓰기에서 멀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도 가끔 좋은 아이템이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글 쓰는 버릇이 사라지자 당최
손가락은 움직이지가 않았다. 그렇게 근 1년이 지났다.
그러다 이번에 오토바이가 미끄러지는 사고가 난 것이다.
사고가 난 지점은 세부의 "지나틸란(Ginatilan, Cebu)"이라는 동네다.
보홀에 사는 내가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와서 사고를 냈냐면....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이상해져서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온몸에서 부스럼이 올라온다.
누구는 아토피라고 하고 누구는 건선이라고 하고 누구는 알레르기 하고 하는 이 애매한 현상이
보홀 생활을 하면서 부쩍 심해졌다.
예전에도 한 번 피부가 심하게 안 좋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친구가 내 피부를 보더니,
"온천 한 번 다녀와야겠는 게?" 하는 게 아닌가?
"무슨 온천?" 했더니,
처가인 세부의 "말리부욕"이라는 곳에 산속에 있는 작은 온천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아토피로 평생을 고생한 사람이어서 처가에 갈 때마다 거길 들러 하루나 이틀 쉬고 온다고 했다.
그렇게 온천을 하고 나면 적어도 한동안은 아토피를 잊고 산다고....
그 말에 혹해서 나도 그 온천을 찾게 됐다.
근데 신기하게도 이틀 정도만 열심히 물놀이를 하면 가려움증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로 이곳은 내게 피부병 치료센터이자 힐링의 장소가 됐다.
이곳은 시설이 열악하여 관광객이 좋아할 수가 없는 곳이고 필리핀 사람도 접근이 어려워 많지 않다.
가끔 휠체어를 탄 할머니를 업고 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마도 현지인에게 여긴 영험한 '약탕'이라고
소문이 나 있는 듯했다. 근처만 가도 유황 냄새가 진동해서 꼭 약품을 풀어놓은 듯한 느낌이 드니
그럴 만도 하다.
옆으로는 차가운 계곡물이 흐르고 그 한쪽에 뜨끈한 탕이 있으니 새벽 일찍 안개가 걷히기 전에 올라가면
진짜 신선이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물도 뜨거워 원수가 나오는 탕에 들어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글로 써놓으니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가끔 관광객들이 오면 10분도 안 되어
모두 혀를 끌끌 차며 철수한다. 고생하며 갈 정도의 명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세부에 있을 때도 자주 못 가던 이런 오지를 보홀에 살면서 갈 생각을 한 것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세부 오슬롭(Oslob, Cebu)으로 가는 2시간짜리 여객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오슬롭 선착장에서 온천까지는 정확히 56Km이다.
내가 살던 세부의 막탄에서 가는 걸 생각하면 반도 안 되는 거리지만 오토바이로 달려 보면
필리핀 국도 56km는 보통 거리가 아니다. 그래도 몇 번은 별 탈 없이 잘 다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대로 사고가 난 것이다.
내가 도로에 쓰러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다.
누구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누구는 부러진 백미러를 주워서 끼우고 누구는 날 부축해서 길가로 옮겼다.
그러면서 동시에 물었다.
"R u ok?"
"......?" (지금 상태가 오케이겠냐?)
일어나서 사람들을 쳐다보는데 눈가에서는 붉은 액체가 흐르고 입에서 피맛이 났다.
바지는 찢어졌고 상의는 흙먼지를 뒤집어써 엉망이었다.
팔꿈치와 무릎은 피와 흙이 범벅이 되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아~~!! ~~ ~~ 됐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왔다.
일단,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 자리를 피해서 200미터 앞 구멍가게로 가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껍데기가 홀랑 벗겨졌지만 오토바이는 운행에는 지장이 없었다. 문제는 내 몸이었다.
상처도 상처지만 온몸이 아파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일단 생수로 대충 상처를 씻고 주위를 둘러보니 길 건너 바닷가 쪽에 작고 허름한 리조트가 보였다.
문을 두드리자 여직원이 날 보더니 이런다?
"What happen?"
".... (보면 모르냐?)"
돈을 내자 그녀는 방 키와 함께 불쌍한 눈초리로 구급함을 내줬다.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가 3분의 2를 차지하는 바닷가 쪽의 작은 공간이 날 맞이 했다.
옷을 벗으니 온몸이 엉망이었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샤워를 할까 했지만 샤워실이 워낙 열악하여 피와 흙이 범벅인 상처 부위를 씻을 수가 없었다.
이도저도 못하고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젠장~~, 이걸 어떻게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다가 문득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부의 북쪽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생각했다.
"바닷물에 한 번 들어갔다 와야겠다."
미친 짓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가장 깔끔하게 몸을 씻을 방법 같았다.
반바지로 갈아입고 웃옷은 입은 체로 계단을 내려가 바다로 들어갔다.
바다에 몸을 담그자 "으~~ 윽~~" 하는 신음이 절로 났다.
바다의 소금물이 온몸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2분쯤 지나자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 이거 괜찮네." 생각하며 얼굴을 담그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더니,
바닷물에 얼굴에 눌어붙었던 흙먼지 찌꺼기가 깨끗이 씻겨 나갔다.
바닷속에서 흙먼지에 절은 셔츠를 벗어 대충 빨래를 하고 한동안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바닷물에 씻겨나간 상처부위가 시뻘건 것이 괴이해 보였지만 생각보다 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온몸이 무지 아팠다. 삭신이 쑤신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어쨌든 이제는 치료를 할 차례였다.
리조트 직원에게 물어보니 가장 가까운 약국이 4Km 정도 떨어진 읍내에 있다고 했다.
나는 다시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읍내 약국으로 향했다.
오토바이를 달리니 바닷물에 씻긴 상처가 상쾌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읍내에서 진통제와 붕대를 비롯한 각종 약과 비상식량을 한그득 사들고 리조트로 돌아왔다.
침대에 기대앉아 약을 바르고 반창고와 붕대로 얼기설기 동여맷더니 몸의 반쪽이 거의 미라 수준이 됐다.
큰 수건과 티셔츠 두 장을 침대에 깔고 아프지 않은 방향으로 누웠다.
방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그제야 앞으로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몰려왔다.
새벽 6시 30분 배를 타기 위해 4시 30분 일어났다.
어젯밤 1시가 넘어 일이 끝났으니 3시간도 못 자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몸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에서 시골길을 익숙지 않은 오토바이로 운행했으니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었다.
"오토바이 수리비는 어쩌지?", "병원은 안 가도 될까?" "내일 아침 배로 돌아가야 하나?"
"오늘 밤에 갑자기 더 아파지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지?"
누워서 커튼이 드리워진 창을 보는데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근데 이상한 감정도 몰려왔다.
"근데, 여기 의외로 편하네.... 음~~."
신기하게도 나는 이 허름한 리조트가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통증인지 피로감인지 약기운인지 모르는 몽롱함 속에서 이런 소리를 했던 거 같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