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3부 시작)
오후 6시가 되어 잠에서 깼다.
밖을 나와 보니 비를 머금은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고 있었다.
방 여섯 개에 직원이 한 명뿐인 이 리조트가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간단히 저녁을 먹고 시멘트 벤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리조트의 전등이 켜졌다.
크리스마스 전구를 닮은 형형색색의 불빛이 리조트를 감싸며 빛을 발했다.
노을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내일도 여기서 하루 더 쉴까?"
"일찍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어차피 오토바이 렌트비는 사흘 치를 냈잖아?"
"애라 모르겠다. 내일 아침에 생각하자"
이런 혼잣말을 하며 방으로 돌아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진통제 탓인지 상처가 가벼워서인지 생각보다 통증이 심하진 않았다.
그때 밖에서 천둥 번개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굵은 빗소리가 사정없이 지붕을 때렸다.
창 밖을 보니 조용한 바다 위로 폭포수 같은 빗줄기가 들이붓고 있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바다는 참 잔잔하네..."
생각을 하다 언젠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거의 12시간 지나서 잠에서 깼다.
허리와 다리가 욱신욱신했지만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밖을 나와 보니 밤새 비 때문인지 하늘은 맑았고 바다는 아름다웠다.
카운터에 가 여직원에게 1박을 더 하겠다며 추가 요금을 지불했더니,
여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Really?" 한다.
"..... ㅎㅎㅎ, (나 여기 맘에 들어))"
나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온천으로 향했다.
약 6.5km만 가면 '말라부욕(Malabuyok, Cebu)' 온천이 나온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안 갈 이유가 없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 상처가 어찌 될 진 모르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왔으니 발이라도 담그고 싶었다.
"일단 가 보면 또 뭔가 어떻게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오토바이를 달렸다.
마지막으로 온천에 왔을 때는 상황이 매우 안 좋았었다.
새롭게 개장은 했지만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 탕 안에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고,
심지어 탕 위를 둥둥 떠다녀 손으로 걷어내야 몸을 담글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많이 변해 있었다.
입장료가 생기고부터 누군가 청소를 하는지 전보다는 훨씬 깨끗했다.
온천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처음 상처에 뜨거운 물이 닿을 때는 온몸에 전율을 일었지만 바닷물에서 처럼 2분 정도가 지나자
생각만큼 상처 부위가 아프지 않았다. 어젯밤에 큰 비가 와서인지 시냇물이 불어 시냇물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어쨌든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원래는 시냇물에 누워 있다 온천탕에 들어왔다 하는 게
기본인데 이날은 밤새 비로 냇물이 불어 있어 그건 못했다. 조금의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여긴 정말
좋은 휴양지이다. 노후에는 바닷가보다는 이런 곳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온천을 마치고 읍내에서 장을 봐서 리조트로 돌아왔다.
돌아오니 아침 8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방에서 상처를 소독하고 나니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바다만 바라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멍하니 앉아 있는데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이거~~ 너무 좋은데??"
"의자만 편하면 하루 종일도 앉아 있겠다."
1시간쯤 멍하니 바다를 보고 있다가 노트북을 꺼내왔다.
그리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거의 1년 만에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글을 써서인지 떠오르는 생각들이 연결되질 않았다.
그래도 일단 되는대로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지치면 바다로 내려가 수영을 했다.
리조트 직원이 점심을 먹겠냐고 해서 그러겠다 했더니,
제일 비싼 170페소(3,900원) 식사를 차려줬다.
오후가 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다시 온천으로 갔다.
그날 두 번의 온천욕을 했고 밤에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조명 아래서 글을 썼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온천을 한 번 더 다녀와서 짐을 꾸렸다.
상처를 소독하고 침대 위에 "Thank you"라는 메모와 함께 구급함과 간소한 팁을 올려놓았다.
이 앞을 자주 지나게 되겠지만 다시 여기를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묵었던 이틀은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호텔 직원에게 키를 넘겨주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돌아오는 길은 훨씬 가볍고 즐거운 드라이브였다.
오슬롭에 도착해서 오토바이 가게에 사고를 설명하고 수리비를 지불했다.
사장이 말했다.
안 죽고 살아왔으니 다행이라고, 오토바이는 고치면 된다고.....
그러고는 선착장까지 태워줬다.
헤어지면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See you next time, Sir."
이렇게 나의 여행은 마무리 됐다.
다음 날 회사 직원들이 내 얼굴과 팔, 다리를 보고 모두 호들갑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의 상처를 설명해야 했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아마도 여행의 뒤끝이 좋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몇 년 후에 이 여행기를 본다면 무엇이 떠오를까?
길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때 그 순간의 고통과 황당함,
바다에서 몸을 씻고 나올 때 느꼈던 그 통증과 비릿한 입맛,
허름한 밤에서 끙끙대며 들었던 천둥 번개와 빗소리,
쓰라림을 참으며 이를 악물고 들어갔던 온천탕,
그런데,
이런 것들 보다 다른 것들이 더 떠오르지 싶다.
멍 때리며 바라보던 장판 같던 바다,
한 명 밖에 없는 손님에게 정성껏 차려주던 밥상,
나와 함께 바다를 바라봐 주던 주인집 고양이,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조명 아래서 타이핑을 하던 내 모습....
나는,
추억을 삶의 주름이라 부른다.
세월이 흐르면 거울에 비치는 주름...
추억은 가슴속에 새겨진 주름이다.
2024년, 내겐 깊은 주름 한 가닥이 생겼다.
훗날 미소 지으며 돌아볼 것이 하나 늘어난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 세상 모든 신께 감사...
내 운명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