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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선 Aug 18. 2017

<받아들임>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는 법

 요즘 자존감, 심리 치유, 마음 등을 주제로 자료를 모으고 있다.


 <받아들임>은 불교 수행과 심리치료 관점의 마음 챙김을 얘기한다. 임상심리학자인 저자, 타라 브랙은 불교 명상법을 심리치료에 적용한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자책과 후회 없이 나를 사랑하고, 나아가 타인을 받아들이는 근본적인 수용(radical acceptance)을 말한다. 어떤 부분들은 약간 과하고, 신비주의적으로 느껴졌다. 내게 괜찮았던 선에서,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기록한다.


 




 과거 20년간 나는,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해 고통스러운 짐을 지고 있는 수많은 내담자와 수련생들을 심리학자이자 불교 스승 자격으로 만나왔다. 우리의 대화가 10일간의 명상 수련회 중에 이루어졌든 일주일 단위의 치료 회기 동안에 이루어졌든 상관없이, 그들이 겪는 괴로움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그것은 자신이 불완전하고 무가치하다는 두려움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결함의 느낌들을 자신과 아주 가까운 데서 느끼고 있다. 그저 다른 누군가의 성취에 대해 듣거나, 비난받거나, 논쟁을 하거나, 일에서 실수를 했을 때처럼 우리가 괜찮지 않다고 느끼기까지는 많은 것이 필요치 않다.

 내 친구가 말한 것처럼 "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내가 항상 호흡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유독가스다." 자신에게 결함이 있다는 시선으로 삶을 경험할 때, 우리는 내가 '무가치감의 트랜스'라 부르는 것 안에 갇히게 된다. 이 트랜스에 붙잡힌 나머지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 그 진실을 지각할 수 없게 된다. /p.19


 많은 사람들이 내게 말하기를, 그들의 인생이 얼마나 오랫동안 자기혐오와 수치심의 감옥에 갇혀있었는지를 마침내 알 수 있게 되었을 때 슬픔만이 아니라 삶이 주는 희망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우리의 감옥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잠재력 역시 볼 수 있다. 7세기의 저명한 선사인 승찬 스님은 참된 자유란 "불완전함에 대해 근심이 없는"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는 인간의 존재와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불완전함은 우리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존재의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욕구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며, 병이 들고 약해진다. 불완전함을 편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달라지려고 하거나 잘못된 것을 두려워하는 데 빠져 우리 삶의 순간들을 잃어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p.45



 근본적 수용은 체념이 아니다. 근본적 수용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그냥 수용하면 변화와 성장의 동기를 잃을 거라는 생각이다. 수용은 나쁜 습관을 지속하기 위한 변명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 심리학자 칼 로저스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했다. "신기한 역설은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내가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경험의 모든 부분에 대해 근본적 수용을 적용하는 것은 진정한 지속적 변화로 가는 길을 여는 근본적 변화임을 나는 거듭 확인했다. (...)

 근본적 수용은 자신의 한계로 자신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다. 움츠러드는 것의 변명이 아니다. (...) 변화의 진실, 즉 우리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른다는 것을 수용하여 활기차고 의욕적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희망에 스스로를 개방하게 된다. (...)

 근본적 수용은 방종이 아니다. "나는 내가 이런 욕망이나 갈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수용한다. 고로 나는 그대로 행동할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의 욕구를 부정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무엇이 우리를 추동하며 행동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의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p.69-71





불교의 위빠사나(마음 챙김) 훈련은 내게 그저 마음을 열고 변화하는 경험의 흐름이 나를 통해 흘러가도록 허용하라고 가르쳤다. 그 결과 나는 가혹한 자기비판이 마음에서 일더라도 그것이 지나가는 생각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그런 자기비판이 집요하고 상습적인 방문객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내게 놀라운 자유를 줬다. /p.76-77


<명상 연습 : 위빠사나(마음 챙김) 수행>

마음 챙김 능력을 기르는 불교수행을 위빠사나라고 부른다. 이 말은 붓다 당시의 언어인 팔라어로 '명확하게 보기' 혹은 '통찰'을 의미한다. 이 훈련을 아래에 간단히 소개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녹음에서 듣거나 누군가에게 읽어달라고 해서 들을 수 있다.


"졸리거나 멍하지 않은 또렷한 의식으로 편안히 앉는다. 등을 바로 펴되 긴장하지 않도록 한다. 눈을 감고 손은 편안하게 힘을 빼고 내려놓는다. 자신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마음의 눈으로 천천히 살펴본다. 긴장한 부분에 이르게 되면 부드럽게 긴장을 푼다.

 보통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서 길을 잃고 헤매기 쉽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먼저 한다. 호흡을 마음 챙김의 주요 단서로 사용하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당신을 통해 일어나는 삶의 변화하는 흐름에 깨어있을 수 있다.

 심호흡을 몇 차례 한 다음 자연스럽게 호흡한다. 호흡을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부위에 주목한다. 숨이 코에서 들어오고 나갈 때 느낄 수 있다. 콧구멍 주위나 인중 근처에서 숨이 드나드는 걸 느끼기 쉽다. 혹은 가슴의 움직임이나 배가 불렀다 꺼졌다 하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이 가운데서 호흡이 가장 뚜렷하게 느껴지는 한 곳을 정해 호흡 감각에 주의를 둔다.

 호흡을 통제하거나 호흡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올바른'호흡법은 없다. 호흡은 코나 배에서의 감각 변화로 느껴진다. 편안하되 깨어있는 의식으로 매 순간 호흡에 따른 감각의 변화를 느껴본다.

 마음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계속 떠오를 것이다. 생각은 적이 아니다. 마음에서 생각을 쫓아낼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한 생각에 빠져 계속 이야기를 만들며 헤매지 말고, 생각이 떠올는 순간 그것을 알아차린다. 생각이 떠오른 걸 알아차리면 바로 "생각, 생각."이라고 부드럽고 친절하게 마음속으로 이름을 붙여도 좋다. 그런 다음 어떤 판단도 하지 말고, 곧바로 호흡으로 돌아온다. 호흡이 홈베이스, 즉 온전한 깨어있음의 장소가 되게 한다. 지나가는 차 소리, 따뜻하거나 차가운 느낌, 배고픔의 감각 등 다른 경험이 느껴질 수 있지만, 굳이 쫓아내려 하지 말고 그냥 의식의 배경에 내버려둔다.

 만약 어떤 특정한 감각이 강해져서 계속 신경이 쓰이면, 호흡 대신에 이 감각을 마음 챙김의 주요 대상으로 삼는다. 따뜻함이나 차가움, 따끔거림, 쑤심, 비틀림, 찌름, 떨림을 느낄 수도 있다. 부드럽고 열린 의식으로, 감각을 단지 있는 그대로 느낀다. 그 감각들은 유쾌한가, 불쾌한가? 그것들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면 더 강해지는가, 사라지는가? 그것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차려본다. 그런 감각들이 누구러지면 다시 호흡 마음 챙김으로 돌아온다. 만약 그 감각들이 너무 불쾌해서 마음의 균형과 평정이 흐트러진다면, 주의를 다시 호흡으로 돌려도 괜찮다.

 유사한 방식으로 두려움, 슬픔, 행복, 흥분, 비탄 등의 강한 감정을 마음 챙김 할 수 있다. 떠오르는 감정에 매달리거나 저항하지 말고, 또렷이 깨어서 부드럽게 경험을 바라본다. 이 감정이 몸에서 어떤 감각들로 느껴지는가? 어디서 그 감정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가?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가, 움직이는가? 얼마나 큰가? 생각이 불안하고 생생한가? 생각이 반복적이고 둔한가? 마음이 닫혀 있는가, 열려있는가? 주의를 기울일 때 감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알아차림 한다. 더 강해지는가, 더 약해지는가? 다른 상태로 변하는가? 분노에서 슬픔으로? 행복에서 평화로? 감정이 누그러지면 주의를 다시 호흡으로 돌린다. 만약 감정이 당신을 압도한다고 느끼거나 주의를 어디에 둘지 혼란스러우면 편안하게 호흡으로 돌아온다."


 마음 챙김을 훈련할 때 일어나는 특정한 신체적 감각, 정서적 느낌, 생각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근본적 수용의 씨를 심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 간에 기꺼이 멈춰서 우리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점차로 우리가 명상을 할 때든 일상생활에서든 지나가는 경험에 대해 명료하고 부드럽게 관계 맺는 능력이 길러지게 된다. /p.90-82




 보리수 아래 앉아 있는 붓다의 모습은 멈춤의 힘을 묘사하는 위대한 신화적 상징 중 하나다. 싯다르타는 더 이상 쾌락에 집착하거나 어떠한 경험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변화하는 삶의 흐름에 자신을 완전히 맡겼다. (...) 싯타르타는 보리수 아래 멈춰 있기로 결심했을 때, 마라(Mara)라는 신으로 대변되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과 완전히 맞닥뜨렸다. 산스크리트로 mara는 '망상'을 의미하는데, 우리를 갈망과 두려움에 얽어매고 깨달음의 본성을 흐리게 하는 꿈같은 무지를 뜻한다. 전승되는 얘기에서 마라는 심한 폭풍, 매혹적인 미인, 성난 악마, 대규모 군대 등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 싯타르타는 도망가거나 맞서 싸우려 하지 않고 용감하게 그리고 마음 챙김 하며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에 마음을 열었다. 대응하는 대신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는 우리를 고통 속에 가두는 분리된 자기의 망상 너머를 보았다. 밤새도록 싯타르타는 마라의 군대에 공격당하면서 탐욕과 증오의 화살 세례를 받았다. 그가 열리고 애정 어린 가슴으로 각각을 마주하자 그것들은 꽃송이로 변하여 그의 발 쪽에서 부드럽게 흩날렸다. 시간이 갈수록 향기로운 꽃잎 더미가 두텁게 쌓였고, 싯타르타는 점점 더 평화롭고 또렷해졌다. (...) 싯타르타는 자유를 얻었다. 그는 순수한 본성, 사랑의 빛나는 의식을 깨닫고 깨달은 이, 즉 붓다가 되었다.

 근본적 수용 훈련은 보리수 아래에서 우리가 멈추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붓다가 마라와의 대면에 자신을 기꺼이 열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멈춰서 매 순간 삶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에 열려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틱낫한 스님의 말처럼 "삶과의 약속을 지킨다."/p.98-99


정신을 멍하게 하는 트랜스를 뚫고 나갈 수 있는 마음 챙김의 한 도구가 '질문하기'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신의 경험에 관해 질문할 때, 주의가 동원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라고 질문한다. 또한 "바로 지금 무엇이 내 주의를 원하지?" 혹은 "무엇이 수용을 요청하고 있지?"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 중요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조건 없는 친절의 태도로 질문에 접근하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싫은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주의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면, 자기 판단이 깊어질 따름이다. 곤경에 처한 친구를 대할 때와 똑같은 친절과 배려를 가지고 자기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배우는 데는 훈련이 필요하다. (...)

 주목하기는, 질문하기와 마찬가지로 배려와 너그러움을 가지고 사고, 감정, 감각의 흐름을 알아차리도록 도와준다. (...)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불쾌한 경험을 붙잡거나 치워버리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마라여, 나는 너를 본다"라고 부드럽고 온화하게 말하는 방법이다. (...) 서양 심리학에서는 보이지 않고 의식적으로 이름 붙이지 못하는 우리 정신의 측면이 삶에 통제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마라의 군대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 이름 붙이기를 하면 더 이상 그들에게 사로잡혀 이리저리 내몰리지 않게 된다. 심지어 그들을 두려움이 아니라 친절로 대하면 그들의 힘이 약해지기까지 한다. p.119-123




 나는 스승과 중요한 면담을 가졌다. 내가 얼마나 감정에 압도되었는지를 얘기했을 때 그녀가 물었다. "당신은 욕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나요?" 나는 깜짝 놀랐다. 욕구는 나의 적이었고, 나는 전투에서 지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은 내게 마음 챙김 수행의 핵심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가 아니라 "경험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다. 그녀는 내게 경험과 싸우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욕구하는 마음의 본질을 살피라고 충고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수용할 수 있으며, 다만 거기서 길을 잃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켜주었다.

  욕구는 대개 불편하긴 해도 나쁜 것은 아니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욕구의 끌어당김은 생존 장치의 일부이다. 그것은 우리가 먹고, 성행위를 하고, 일하러 가고, 하고 있는 일을 잘 하도록 유지해준다. 또한 욕구는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자비로운 의식을 깨달으면서 살게 도와주는 영적 수행을 할 마음을 우리에게 준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삶의 에너지가 심오한 깨달음을 위한 연료가 되기도 한다. 욕구는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장악해버릴 때만 문제가 된다. 붓다가 말한 '중도'의 가르침은 욕구에 붙잡히거나 욕구에 저항함 없이 욕구와 관계 맺는 것이다. /p.192-193


 문제는 어떤 경험이 아무리 만족스럽다 할지라도 변하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붓다는 이것을 첫 번째 숭고한 진리로 꼽았다."실존은 본질적으로 불만족스럽다." 고등학교에서 이 가르침을 "삶은 고통이다."라는 가장 일반적인 번역으로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당연히 삶이 비참하고 괴로운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괴로움에 대한 붓다의 이해는 더 미묘하고 더 심오하다. 우리의 기분, 몸, 일, 사랑하는 사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등 우리 삶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불편하다. 아름다운 저녁노을, 달콤한 맛,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밀한 순간,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육체와 정신의 바로 그 존재까지 그 어떤 것도 계속 잡고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은 왔다 가기 때문이다. 어떠한 영구적 만족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또 다른 원료와 자극의 주입을 필요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재확인, 치료, 운동, 명상을 원한다. 더 나은 뭔가가 되고 다른 뭔가를 경험하도록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몰아붙인다. (...) 삶의 모든 국면에서 항상 충분히 좋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며, 우리를 사랑하고 존중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뭔가가 빠졌거나 잘못되었다는 느낌에 끌려 다닌다. 우리를 괴롭히는 매일의 욕구는 우리가 편안해지고 더 근원적인 갈망을 의식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우리는 미래가 현재 순간에 얻지 못하는 만족을 제공해주기를 희망하며 끊임없이 다음 순간에 기댄다.

 욕구(desire)라는 단어의 라틴 어원인 desidus는 '별로부터 멀리'라는 의미다. 이것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해석하면, 별은 모든 생명의 에너지 원천이고 순수한 의식의 표현이다. 이 살아있음과 깨어있음은 우리가 가장 깊이 열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별 안에 있기를,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깨닫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우리의 욕구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에 습관적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우리는 '별로부터 멀리'있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 삶으로부터, 우리 존재의 핵심인 의식과 사랑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존재의 원천으로부터 멀리 있다고 느끼면, 우리는 욕구와 욕구를 만족시키는 방식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p.194-196






나는 원들을 넓히며 인생을 산다.
그 원들은 세상 속에서
넓게 넓게 퍼져나간다.
나는 마지막 원을 아마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일에
내 인생을 던졌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 앞마당의 나무 혹은 가지에 앉아있는 다람쥐에게 온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마다, 이 살아 있는 에너지는 우리 존재의 친밀한 일부가 된다. 영적 스승인 크리슈나무르티는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 실제로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주의는 사랑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는 삶에 감동받고, 자연스럽게 마음을 더 열리고 더 연결된다.

 언젠가 달라이 라마가 언급했듯이 "나는 사람들이 왜 나를 그토록 많이 좋아하는지 모른다. 그것은 내가 보리심(깨어있는 가슴/마음)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 틀림없다. 나는 수행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깨어있는 가슴을 사랑한다. 그것이 활짝 핀 꽃처럼 우리 본성의 완전한 실현이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다는 느낌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서로 간에 그리고 우리 주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 마음이 열려있고 관대하고 사랑으로 채워져 있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장 잘 느낀다. (...)

 자신의 두려움, 분노, 슬픔에 접촉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를 깨우는 것처럼, 타인의 취약성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의 가슴이 열리고 온화해진다. 자신에 대한 자비는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자비를 일으킨다. 사랑이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느낌을 기술하는 것이라면, 타인에 대한 자비는 우리 모두 고통을 안고 산다는 진실을 깨달을 때 일어나는 사랑의 향기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가슴으로 삶을 사는 것은 보살의 길, 즉 보살도(菩薩道)의 핵심이다. (...) "모든 상황이 자비를 깨우기를."이라는 보살의 염원은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든 수용과 보살핌으로 보듬도록 도와준다. 고통을 자비로 바꿀 때, 우리는 모든 생명의 상호 연결성을 깨닫게 된다. 이 깊은 깨달음에서 보살이 품는 두 번째 염원이자 보살의 가장 중요한 면이 생겨난다. "나의 삶이 모든 존재에게 이롭기를." 불교 경전에서 이 염원은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남김없이 자유로워질 때까지 궁극적 자유인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보살 서원으로 표현된다. (...) "보살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바쳐서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수행을 한다." 이 서원에 깃든 무아(無我)의 정신은 우리가 하나임을 상기시켜주고 무한한 자비의 능력을 심화시켜준다.  우리는 모든 존재의 고통을 보살핌으로 감싸 안기에 충분할 만큼 넓고 온화해지기를 염원할 수 있다. /p.310-314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삶을
보살피고 인도해주는
자비로운 어머니처럼
한없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모든 존재를
감싸 안으라.

 -붓다

/p.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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