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세계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백만 명이 넘는 여성이 전쟁에서 싸웠지만 침묵해야만 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인터뷰로 2백여 명의 목소리가 비로소 세상에 전해진다.
우리는 전쟁에 대한 모든 것을 '남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았다. (...) '여자'의 전쟁에는 여자만의 색깔과 냄새, 여자만의 해석과 여자만이 느끼는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여자만의 언어가 있다. 그곳엔 영웅도, 허무맹랑한 무용담도 없으며, 다만 사람들, 때론 비인간적인 짓을 저지르고 때론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만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땅도 새도 나무도 고통을 당한다.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고통스러워한다. (...) 나는 바로 이 전쟁의 역사를 쓰고자 한다. 여자들의 역사를. /p.17-18
이 책은 2015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목소리 소설(novel of voice)이라는 새로운 장르라고 불린다. 인터뷰 모음집이기에 문학이라 볼 수 없다는 비판이 있지만, 저자는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회상은 역사도 문학도 아니라고 말한다. 회상은 예술로 승화되지 못한 추레한 인생의 한 모습일 뿐이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바로 그곳, 따스한 사람의 목소리, 과거가 생생히 반추되는 그 목소리 속에 원초적인 삶의 기쁨이 감춰져 있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비극이 담겨있다. (...) 감정이야말로 나에겐 현실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역사는 거리에 있다. 군중 속에. 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의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p.25
전쟁을 겪은 여성들은 옛날이야기하듯 자신의 사연을 들려준다. 생명을 주는 존재인 여자에게 죽이는 일은 죽는 일보다 더 힘겨웠다고. 매일이 참혹했지만 삶은 계속되었다고. 사람 냄새나는 역사의 조각들이 5백 페이지에 걸쳐 엮여있다.
나는 '하찮은 이야기 따위는 필요 없소... 우리의 위대한 승리에 대해 쓰시오...라는 추신이 덧붙여진 편지를 여러 번 받았다. 하지만 나에겐 바로 이 '하찮은 것'들이 중요하다. 이 하찮은 것들이야말로 삶의 온기이자 빛이므로, 긴 머리 대신 뭉툭하게 잘려나간 짧은 앞머리, 뜨거운 죽 냄비와 국그릇들이 돌아오지 않는 주인들을 기다리고 전투에 나갔다 무사히 돌아오는 사람은 백 명중에 일곱 명 정도였다는 이야기, 혹은 전쟁터에 다녀온 후로는 줄줄이 걸린 붉은 살점의 고기를 볼 수가 없어서 시장에도 못 다니고, 심지어 붉은색이라면 사라사 천도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사연들.. /p.32
화자가 여자라는 점에서 의미 있지만, 여자는 감정적이라는 일반화가 전제여서 아쉬웠다. '전쟁은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제목이 더 맘에 든다.
이야기의 운을 떼기만 해도 벌써 고통이 느껴져.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시 가슴이 먹먹해지고 온몸이 벌벌 떨려. 모든 게 생생하게 떠올라서. 죽어 엎드러진 우리 병사들 모습. 외치다 외치다 다 외치지 못한 사연이 있는 듯 벌어진 입술, 쏟아져 나온 창자들. 아마 땔감보다 우리 병사들 주검을 더 많이 봤을걸. (...)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해? 어떤 표정으로? (...) 눈물부터 쏟아져. 하지만 반드시, 꼭 이야기해야 해. 우리가 겪은 일이 헛되이 사라지면 안 되니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이 세상 어디엔가 우리의 비명소리가 남아 있어야 하니까. 우리의 그 피맺힌 통곡이.. /p.551-552
교과서에서 읽거나 영화로 봤던 전쟁이 실화란 걸, 이제야 느꼈다.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은 나처럼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 시대에 태어났을 뿐.
마리야 아파나시예브나 가라추크, 군의관: "아침이었어... 전쟁이 났다는 무서운 소식을 들은 건... 풀잎에 맺힌 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았는데, 전쟁이라니. 풀잎이며 나뭇잎에 송알송알 맺혀있던 이슬방울들, 그날 아침 예쁘게 반짝이던 그 이슬방울들이, 전쟁터에서 문득문득 떠오르곤 했어. 자연은 사람들의 불행 따윈 관심 없다는 듯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어. 태양은 밝게 빛나고... 내가 좋아하는 캐모마일은 온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고... 한 번은 밀밭에 몸을 숨기고 있었어. 햇살이 눈부신 날이었지. 독일군의 기관총이 '따다다다...' 한바탕 불을 뿜고는 조용해졌어. 사그락 사그락 밀 잎사귀 부딪히는 소리만 귀를 간질였지. 그리고 다시 쏟아지는 독일군의 총소리 '따다다다...' 총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어. 밀 잎사귀의 속삭임을 나는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그 다정한 속삭임을..." /p.126
소녀들은 자원하여 전선으로 나갔다. 열일곱 소녀들이 처음부터 용감했던 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단 삼일 만에 강인한 군인이 되어야만 했다.
클라브디야 그리고리예브나 크로히나, 상사, 저격수: "처음에는 무서웠어. (...) 나는 딸각하고 방아쇠를 당겼고, 그 병사는 쓰러졌어. 아, 달달달 몸이 떨리는데, 내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지. 결국 나는 큰 소리로 울고 말았어. (...) 하지만 나중에 그런 마음은 싹 사라졌지.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잿더미 속에 사람 뼈들이 있고 그 뼈들 사이로 까맣게 탄 별 모양이 보이는데... 그건 거기서 불타 죽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 부상병들이나 포로들이었다는 의미였지. 그 일을 겪고 난 후로는 아무리 적병을 죽여도 더 이상 괴롭지 않았어. 새까맣게 탄 별 모양을 본 후로는... 전쟁이 끝나고 나는 백발이 돼서 집으로 돌아왔어. 겨우 스물한 살에 노파처럼 머리가 하얗게 세버린 거야.
(...)
우리 정찰병들이 독일군 장교 한 명을 포로로 붙잡았어. 그런데 그 포로가 깜짝 놀라는 거야. 그의 진지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어나갔는데, 하나같이 머리에 총을 맞았다면서. 그것도 거의 똑같은 자리에. 그 장교가 거듭 말했어. 평범한 저격수가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머리만 맞힐 수는 없다고. 그것도 그렇게나 정확히. 그리고 부탁했지. '우리 병사들을 그렇게 많이 죽인 그 저격병을 한번 만나게 해주시오. 내 밑으로 꽤 많은 보충병력이 배치되었는데도 매일같이 10여 명씩 죽어나갔소.' 그러자 연대장이 대답했어. '유감스럽지만 그 부탁은 들어줄 수가 없소. 그 병사는 소녀 저격병이었는데 전사했소.' 그 소녀병은 사샤 실랴호바라는 아이였어. (...) 저격병이 소녀였다는 사실을 알고 독일 장교는 충격을 받아 한동안 말을 못 하더라고. /p.74-76
그녀들은 보호받아야 되는 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기관총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위기에서 소녀병들이 전장으로 기어가 부상병을 끌어내 와서 각자 두세 명씩 살렸다고 한다. 상대편 독일군조차 깜짝 놀라 총격을 멈추고 멍하게 바라볼 정도였다고.
마리야 이바노브나 모로조바, 상등병, 저격병: 우리는 다 같이 군정치위원회로 몰려가서 군사 프로그램에 등록했어. 잘은 모르지만, 친구들이 하니까 따라 한 아이도 있었을 거야. 우리는 소총 다루는 법이랑 수류탄 던지는 법을 배웠어. (...) 모두 우리를 귀여워해 주고 늘 불쌍하게 여겼어. 우리는 우리를 불쌍해하는 게 정말 싫었어. '정말 우리는 다른 병사들처럼, 진짜 군인이 아니란 말인가?' 아무튼 마침내 우리는 전선에 도착했어. (...)
대령이 우리더러 '어떻게 총을 쏘고 위장술을 하는지 봐야겠다'며 시범을 보이라는 거야. 우리의 사격 실력은 훌륭했어. 남자 저격병들보다 더 뛰어날 정도였으니까. (...) 대령이 숲 속 빈터로 와서 주위를 살피며 서성이다가 앞이 잘 보이지 않았는지 작은 둔덕에 올라섰어. 그런데 갑자기 '작은 둔덕'이 발밑에서 애처로운 소리를 내는 거야. '아, 대령 동지,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너무 무거워요.' 와, 웃음이 터졌어! 대령은 그렇게 감쪽같은 위장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고도 믿질 못했어. 그러고는 '이제 이 꼬맹이들에 대한 내 말은 모두 취소한다'라고 했지./p.70
그녀들은 목숨 바쳐 싸웠고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훈장을 자랑하는 남자들과 완전히 다른 시선을 받았다. 그녀들은 과거를 숨기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타마라 스테파노브나 윰냐기나, 근위대 하사, 위생 사관: 나는 전쟁영웅이었고, 더욱이 전선에서 왔다는 이유로 조롱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위험을 겪었는데,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의 아들들을, 아내들의 남편들을 구했는데. (...) 저녁에 다들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데 시어머님이 내 남편을 부엌으로 데려가더니 우시는 거야. '지금 누구랑 결혼하겠다는 거냐? 전쟁터에서 데려온 여자라니... 너는 여동생이 둘이나 되잖아. 이제 누가 네 동생들하고 결혼하겠니?' (...)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있었어. '당신은 가장 멋진 하이힐을 신고 다닐 권리가 있다오' 전선의 여자 병사를 위한 노래였지. 내가 음반을 틀자 남편의 큰 여동생이 오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그걸 부숴버리는 거야. '당신들은 그 어떤 권리도 없다'면서. (...) 한 번은 남편과 함께 무료 배급표를 챙겨서 물건을 구하러 갔는데 (...) 판매대에 있던 어떤 남자가 판매대를 뛰어넘어 나한테 달려오지 않겠어. 와서는 나에게 입을 맞추고 얼싸안으며 소리쳤지. (...) 계속 내가 자기를 불길 속에서 구해냈다고 그러는 거야.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을 뚫고 와서 자기를 살려냈다고./p.552
(기차에) 같이 탄 두 남자가 전쟁에 참전했단다. (...) 그러자 대화는 곧장 전쟁 이야기로 달려간다. (...)
-당신 생각은, 여자는 전쟁터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건가요?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나 우리 러시아 여성들은 남편이나 형제,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 놓고 가만히 앉아 애간장만 태우고 있지는 않았소. (...) 하지만 그래서 우리 남자들에게는 죄책감이 있어요. 여자들을 싸우게 했다는 죄책감.(...)
-하지만 그 여자들이 고국을 지킨 건 사실이잖아요? 조국을 구했다고요.
-그건 그렇소만 그런 여자들이랑 정찰은 같이 갈 수 있을지 몰라도 결혼은 하지 않을 거요. 그게, 그래요. 우리 남자들은 여자를 엄마나 아내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요. 결국은 아름다운 숙녀한테 익숙하다는 거요(...)
-전쟁터에서 연애도 하고 그랬나요? 내가 묻는다.
-전선의 소녀 병사들 중에는 아름다운 아가씨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우리 눈에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지.(...) 당신은 형제하고 결혼할 수 있나요?우리한테 그들은 누이였소.
-그럼 전쟁이 끝난 뒤에는요?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처치가 됐소.(...) 사람들은 그녀들이 남편감을 찾아 전쟁터에서 간 거고, 그곳에서 연애질만 실컷 하다가 왔다고 믿었어요. 이왕 터놓고 얘기한 김에 하는 말인데. 실제로 소녀 병사들은 대부분 정숙한 처녀들이었어요. 순결한 처녀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더러운 오물도, 들끓는 이도, 시신들도.. 더 이상 안 봐도 되자 뭔가 아름다운 게 그리워지더군요. 뭔가 밝고 화사한 그런 게.. 아름다운 연인들. (...) 전선에서 돌아오자 친구는 그 아가씨를 버렸소. 4년 동안 닳아빠진 군화에 남자 솜옷을 입고 다닌 그 아가씨가 지겨웠던 거요. 우리는 전쟁을 잊으려고 애썼소. 그리고 그때 사랑했던 여인들도 함께 잊은 거요. /p.169
힘들게 입을 연 그녀가 말했다.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다고. 기억은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우리 몫이다. 과거에 온 땅을 붉게 물들인 희생을 기억한다. 전쟁은 사람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장난감 무기가 싫어.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은 선물이거든. 위대한 선물! 생명은 우리 인간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우리가? 우리는 그랬어.'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 이처럼 처절한 고통을 이겨냈으니 이제 사람들도 서로 가엾게 여기겠지. 서로 사랑할 거야. 달라질 거야.' (...)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 미워해. 다시 서로를 죽이고. 나는 그게 제일 이해가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우리는... 우리는 도저히 그게... /p.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