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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심연 Jan 04. 2023

애증

2020년, 해부학 서적을 바라보며

밤새 읽다가 아무렇게나 방치해두고 잠들어버린 해부학 책이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린다. 백날 공부해도 제대로 외워지지 않고,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심오하기만 한 인체 해부학이란 이렇게 간혹 눈에 띄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때가 있었다. 그래도 잠들기 전까지 읽는 책도, 눈을 뜨고 출근하기 전까지 읽는 책도 해부학 관련 도서다. 지금도, 마음은 굉장히 껄끄럽고 싫었지만 습관처럼 손을 뻗어서 ‘그 책’을 집어 들고 있지 않은가.


그래, 어디까지 읽었더라. 펼쳐드는 책이 제법 허름하다. 벌써 세 번째 정독 중인 도서이니 당연하다. 첫 정독 때는 눈으로 읽고, 두 번째 때는 볼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읽고, 세 번째인 지금에는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원래 강박적이다 싶을 만큼 책을 신성시 여기는 사람이라 몇 번을 읽는다 해도 깔끔하게 새것처럼 보관하는 걸 좋아해서, 책에 낙서를 하거나 줄을 긋는 성미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해부학 책들은 평범한 책이 아니라 전공 도서나 교과서로 분류되어 버려, 근래에는 결국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얼마나 펼쳐봤는지 책머리와 책배, 책 꼬리 등은 이미 거뭇거뭇하게 때가 탔다. 조만간 이 책은 걸레짝과 다름없어질 거라는 예상이 들었다.


물론, 의사들이 읽는 그런 류의 해부학 도서는 아니었다. 인체 묘사법과 관련된 해부학 도서였기에 의학적인 측면보다는 예술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렇다고 해서 난이도가 낮은 건 아니었다. 의학은 의학대로, 예술을 예술대로 어렵다. 내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은 편도 한 몫을 하는 것 같지만.


좌우간 나는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형광펜과 4B 연필을 동시에 쥐고 있는 상태였다. 세 번째에 이른 정독 과정에서까지 중요해 보이는 내용엔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예시 그림이 나오면 당장 독서대에 책을 올려놓고 스케치북을 펼친다. 4B 연필을 잡고 지금껏 숱하게 따라 그렸던 그 그림을 다시 한 번 그린다. 해부학을 공부하려면 그저 읽고 줄치기만 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스케치북에 직접 여러 번 그려보고, 자신의 것으로 완벽히 만들어야만 했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게. 그렇게 해부학을 공부하면서 다 쓴 스케치북만 두 권 째가 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정말 느리게 정독을 해나갔기 때문에 해부학 책을 읽을 때는 늘 책상 앞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첫 정독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한 순간도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괴롭고 싫고 지겨웠다. 고작 만화를 그리자고 이런 피 같은 시간을 들여 눈물겨운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는 게 막대한 손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것이 있었다.


‘만화, 그거 그냥 그리면 되는 거 아니냐? 뭐가 어려울 게 있어.’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그냥 그리면 되는 건 그림을 취미로 삼는 아마추어일 때나 가능한 얘기다. 그때는 조금만 그려도 실력이 금방 증진되고 눈에 띄게 성장하니까. 하지만 실력이 일정 선에 도달했을 때부터는 인간의 몸이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구조인지 알지 못하면 어중이떠중이 같은 쓰레기만 생산해낼 뿐이다. 불과 얼마 전의 내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세상에 잘 그리는 사람은 넘쳐나고, 그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보는 눈은 높아졌는데, 전문적인 해부학 지식이 없으니 손이 그 눈을 따라가지 못해 어떻게 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그림만 탄생하고 마는 것이다. 그 오랜 굴레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내 부족한 그림과 멱살을 잡고 여기까지 걸어왔다. 강의를 듣고, 해부학 공부를 하고, 크로키를 하고……. 그럼에도 내 바람만큼 내 실력은 성장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입을 모아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그게 가능한 인간이었다면 아마 내 인생은 지금과는 천차만별이었을 테다.


그렇지만 내 그림을 나부터서 좋아해주지 않으면 누가 좋아해준단 말인가. 나는 내 그림을 좋아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 그림 실력을 신명나게 비판하는 얘기만 했지만, 고백하자면 이미 어느 정도는 좋아하고 있다. 내가 보고 싶은 장면과 내가 보고 싶은 표정과 내가 보고 싶은 연출은, 남에게 아무리 잘 설명을 해본다한들 남이 그린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오직 나만이 해낼 수 있는 그림이라는 게 있었고, 최소한의 자기만족을 달성시킬 만한 작품을 그려낸 날엔 뛸 듯이 기쁘기도, 몇 번이고 내 그림을 다시 감상하며 도취되어 있기도 했다. 또 어떤 날은 목적 없이 손이 가는대로 그렸음에도 내 그림이 굉장히 잘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이 예쁘다든가, 색감을 잘 살려냈다든가, 양감을 잘 표현했다든가. 한 스무 번 중에 한 번 꼴로 그렇게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곤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작품도 반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면 도저히 눈뜨고는 못 봐주겠다는 처참한 심정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 심정이 들 때면, 다소 과격하지만, 이 몹쓸 손모가지를 분질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분명 머릿속에 그려지는 완벽한 이미지가 있는데 왜 그걸 손으로 뽑아내지를 못하는 걸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내 나이 때 이미 득도라도 한 듯이 엄청난 작품을 그려냈는데……. 그런 자괴감에 빠졌다가도 연필이나 타블렛 펜을 보면 눈물이 다시 쏙 들어갔다. 그래, 그래도 그려야지. 생닭을 튀기면서 기름방울에 데는 것보다, 부족한 그림을 보며 괴로워하는 게 차라리 좋으니까. 한참 부족한 실력이어도, 마음가는대로 되지 않아도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너무나도 좋기 때문에 괴로우면서도 관둘 생각은 들지 않는 거니까.


그렇게 마음을 도닥이며 오늘도 해부학 책의 페이지를 넘긴다. 나 자신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날까지, 내 그림과는 원수처럼 싸우면서도 서로 도닥이며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모든 창작의 과정이 이럴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곳곳에서 자신의 창작물과 싸우고 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부디 그 싸움에서 승리하고 화해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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