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FLIX 2022 / ch.01_[ 하이틴 ]
여름 오후,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날 듯 말 듯 섬유유연제 향이 난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길을 걷는다. 남학생의 목에는 커다란 헤드폰, 등에는 기타가 들려져 있고, 여학생의 오른팔에는 두꺼운 문제집이 있다. 고개의 각도, 걸음걸이의 텐션에 의하면 남학생은 확실히 여학생을 좋아하고, 대체로 무심하지만 미소를 잃지 않는 표정에 의하면 여학생도 남학생이 싫진 않다. 갑자기 돌에 걸려 넘어질뻔한 여학생을 남학생이 재빠르게 안는다. (여기서 잠시 멈춤. 지구의 시간까지 멈춤. 움직이는 건 흔들리는 눈동자와 꼴깍하고 넘어가는 침뿐) 잠깐의 정적이 어색했는지 여학생 남학생을 밀치고, 남학생은 괜히 화를 낸다. 땀이 살짝 맺힌 채 도착한 편의점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공부는 잘 못하지만 음악엔 진심인 남학생과 그런 남학생이 한심하면서도 귀여운 전교 1등 여학생. 그들의 대화는 쉽게 이어지지 않지만, 끊이지 않는다. 좋아하는 노래라며 이어폰을 건네는 남학생과 ‘됐어’라고 무심하게 말했지만, 끝까지 듣는 여학생과, 심장 소리 들킬까 봐 키운 볼륨과, 아이들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나뭇잎 그림자와 비트처럼 깔리는 매미 울음소리와, 날씨 때문인지 마음 때문인지 살짝 붉어진 두 볼과... 아아 여름이었고, 하이틴이었다____ 는 내가 어디서 보고 듣고 지어낸 미국식 아닌 경기도 남부식 이야기다. 남중과 남고 거기서도 평범과 찐따의 경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에게 이런 풋풋하고 설레는 장면은 하나도 없다. 이 지독한 클리셰 한 번 없는 그런 하이틴이었다니. 그래서일까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여름이 있고, 로맨스가 있고(절대로 사귀는 건 안되고, 좋아하고 수줍어야 한다) 좀 서툴고 유치하지만 진지한 청춘이 있는 이야기 앞에선 무장해제다. 결핍이 만들어낸 환상들이 이렇게 무섭다.
혹시 나와 비슷한 결핍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만화책 H2를 보자. 야구만화를 가장한 여름 냄새 가득한 하이틴 로맨스. 동네 친구였던 꼬맹이들의 키가 자라면서 함께 커버린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과 복잡 미묘한 우정과, 어른인 나보다 진지한 미래에 대한 열정까지 한 곳에 담은 책. 꼬맹이인 줄 만 알았던 남사친과 그 남사친의 절친이 남친인 소녀의 알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간지러운 마음이 있는 책. 응큼한 것을 좋아하는 가벼운 소년이 완투승을 해냈을 때 내가 해낸 양 눈물이 왈칵하는 책. “하느님이 보고 싶으셨던 거겠지 나와 히데오의 대결을”, “난 최고의 타자가 되겠다. 넌 최고의 투수가 돼라”라고 말하는 유세윤이나 할 수 있을 거 같은 오글거림 마저 설레는 이 책. 델리스파이스 ‘고백’과 유희열 ‘여름날’을 있게 한, 마치 그 음악을 듣는 거처럼 읽는 내내 두근두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책. 그러니까 경험한 적 없는 나의 하이틴을 환상적으로 채워준 이 책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하이틴만큼 청량감 넘치는 맥주와 시원 달콤 쫄깃한 올드페리도넛과 함께. 아마도 이런 맛이었겠지라며 없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N3wYcC5wMk
H2와 고백을 한 번에 즐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