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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O Oct 09. 2023

마음의 우기

마음에도 계절이 있다. 우리가 사는 계절의 흐름과 상관없이 달라지고, 더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다. 자주 주변에 의해 날씨가 결정되고 그때의 온도나 습도가 일상을 크게 지배한다. 세상의 계절도 마음의 계절도 예측불가하다는 것은 비슷하다. 한 여름에도 한 겨울에도 마냥 봄의 대낮 같고, 여름 끝 밤 같았으면 좋겠지만 결코 그럴 리 없다.

요 며칠, 아니 몇 주 우기가 찾아왔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런 나의 하루가 꽤 답답했다. 이런 시절이 오면 평소보다 훨씬 주변을 더 살피는데 어찌하여 하나같이 다 잘 살아가고 있는 건지. 만화의 한 장면처럼 맑은 날 내 머리 위에 먹구름이 떴고,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비를 뿌리는 거 같았다. 

어릴 땐 되고 싶은 내가 가 곧 나였다. 꿈꾸는 모습과 차이 나는 나도 괜찮았다. 바라는 내가 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만했다. 물론 그때도 슬픈 날는 많았지만 그것은 그저 지나갈 과정이었으니 며칠 속상하면 됐다. 적지 않은 나이가 되고 나니 그야말로 해낸 것들이 내가 되는 시절이 됐다. 술에 취해 ‘우린 지금 아무것도 아니지만, 내일의 우리는 다르다!’며 으쌰 으쌰 하는 건 좀 철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회사원이 된 지 십수 년,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소수에게 해당하는 멋진 말이었고, 힘들 때마다 꺼내봤던 미스터칠드런의 쿠루미는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딱히 해낸 것은 없고, 희망은 대체로 불안으로 바뀌었고, 남아있는 희망마저 뭔가 유통기한에 임박한 느낌이 들어서 깊은 우기를 보냈다. 해가 날 구멍이 없을 거 같은 이 계절의 비는 털어낼 수 없을 만큼 무겁고 마를 틈 없이 마음을 적신다. 하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다. 위를 보면 비에 젖어 무거워진 몸으론 절대 갈 수 없고 그렇다고 ‘그래도’, ‘그나마’의 위안은 잠시 소강상태만 가져올 뿐이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비가 내렸다. 비가 그치고 훅 가을이 왔다. 이렇게 계절은 달라질 즈음이면 꼭 비가 내린다. 겨울 끝에 봄이 올 때, 벚꽃이 피고 질 때, 여름이 한 여름이 되고, 또 여름이 가을이 될 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비가 오고 나면 달라지는 계절을 믿으며, 오면 오는 대로 맞고 잠시라도 피할 구석이 생기면 피하고. 비 오는 마음속 한 구석에 언젠가 다시 또 볕이 들고 꽃이 피고 밤공기 좋은 시절이 오겠지라는 말을 꾸겨넣으며 살아내는 것. 그거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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