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J형 교사의 프로 일잘러 탈출기
오늘도 또 빠꾸다.
벌써 세 번째 빠꾸다.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 배달업체가 아이스 박스를 준비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과 버스 안에 붙일 표지판 문구가 최근에 바뀐 규정을 반영하고 있지 않아 기준 미달이라는 것이 이번 기획안이 퇴짜를 맞은 주된 이유였다.
연초부터 10월에 있을 수학여행을 기획해왔다. 모두가 기피하는 업무이고 나 또한 좋아서 맡은 일은 아니었지만, 파워 J형 인간으로 계획하는 것을 워낙에 좋아하고 또 그것을 실행에 옮기며 리스트 가득 쓰여 있는 할 일들을 척척 지워 나가는 것을 낙으로 삼는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자 활력소이기도 했다.
작은 학교의 특성상 담당자가 한 명 뿐이고 여행사를 낄 규모도 아니기에 혼자서 프로그램을 섭외하고 동선을 짜고, 이동 시간을 계산하고, 숙소를 계약하고, 운송 업체를 알아보고, 산더미 같은 서류들을 검사하고, 검사받고....... 그 사이에도 담임으로 또 다른 업무의 담당자로 돌아서면 일의 연속이었다.
학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얘, 2월 한 달만 미친년이 되면 일 년이 편하단다!
교과서, 봉사활동, 도서관, 상담, 진로, 환경, 다문화, 양성평등, 수학여행, 출결 그리고 악명 높은 중2 담임에 이르기까지 미친년이 되지 못한 죄로 모두 껴안고 가게 되었다. 처음 업무 분장을 받아들고 부들부들 떨며 못하겠다고 받아 들일 수 없다고 말해 보았지만, 왠걸 인사자문위원들이 결정한 일이고 결재 받은 일이니 이제와서는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들려올 뿐이었다.(도대체 당사자도 모르는 결재를 윗사람들이 해치우는 이런 제도는 어디서 결재를 해준건가!)
4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바꿔 줄 때까지 교무실에 주저 앉아 울 수도 없고, 인수인계 받고 있는 다른 분들 앞에서 이 판은 잘못된 것 같으니 뒤집어 엎자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쭈볏쭈뼛 업무분장을 들고 당혹해하는 나를 보는 교감선생님의 살벌한 눈빛에서 프로답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일을 쳐내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죄책감이 느껴져 주눅이 들 뿐이었다. 올 한해는 힘들겠구나 한숨 쉬며 돌아서는 마음 한 편에 엄마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두 아이들의 얼굴이 얼룩지고 있었다.
미친년이 되지 못한 채로 미친듯이 일을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학교에서는 점심을 먹으면 야근을 해야했고, 집에 오면 겨우 눈을 뜨고 버티다 아이들이 잘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같이 곯아떨어져 버렸다. 그 전까지 이어져 오던 많은 것들이 틀어졌다. 꾸준히 해오던 1년 100권 독서도, 내 손맛에 길들여져 있는 아이들을 위한 저녁 한 끼 집밥도, 남편과 함께 기울이는 맥주 한 잔의 여유도.
온기와 정성도 시간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2학기가 시작되었다. 수학여행 계획서는 통과가 되었고 답사도, 계약도 끝난 상황이었지만 세부 계획서라는 큰 산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교장선생님께 쪽지가 왔다. "선생님, 결제 올리기 전에 계획서 들고 내방으로 와요." 그날 이후 꼼꼼한 교장 선생님의 손 안에서 내 계획안은 몇 번이나 해체되고 재조합되며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 내 손을 떠나지 못했다.(저도 나름 파워 J입니다. 교장선생님!!)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계획서 가득 인덱스 테이프를 붙여 오는 날 보면서도 "파이팅!"하며 조퇴하는 부장님 앞에서 주책 없이 눈물이 흐르고 말았던 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