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리그 타운 이야기 - 하노버 4
얼마 전 한국 청년층의 지방 엑소더스 가속화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2020년 한 해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순이동한 인구 중 92.8%가 20대라고 한다. 또, 2020년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과반을 넘었다고 한다. 심지어 부산과 같은 대도시 청년층도 대부분 수도권으로 이동을 하는데, 일자리도 없는데 살기도 불편하고 비전도 안 보인다는 이유에서다. 부산에 놀러 갈 때마다 어쩌면 서울보다 훨씬 살기 좋을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사회 전체가 공감대를 형성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관한 정책을 법제화하고 각 지역이 스스로 주도해 개성과 매력을 살릴 수 있도록 전략을 짜는 것이라고 한다. 사회의 전반적인 관념을 바꾸는 데는 무수한 세월이 필요할 것이지만, 공감 가는 해결책이다.
미국으로 떠나온 지 이제 6개월 차,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인상적이었던 점은 지속가능한 지역 경제와 인프라였다.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슈퍼급 대도시라고 하더라도 시내에 들어가면 각각 개성이 다른 구역들로 나뉘어 있어고 구역마다 로컬 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어 아주 작은 도시를 걷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런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경제 컨셉이 지방에 가도 활성화되어 있다. 지역마다 로컬 기업, 은행, 상점이 잘 발달되어 있다. 월마트 같은 전국구 브랜드도 들어서 있지만, 로컬 비즈니스가 더 좋은 것이라는 인상은 상품의 프라이싱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호텔 예약을 할 때 힐튼이나 메리어트 같은 전국구 브랜드보다 그 지역에만 있는 스토리텔링이 되어 있는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호텔 (inn 같은)이 더 비싸고 인기가 많다.
물론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기까지 정책, 법, 사람들의 신념과 관념 등 장기간에 걸쳐 생성되어야 하는 중요한 요소들이 뒤받침이 되어야 하며 미국에는 그러한 요소들이 정착이 되어 있는 것 같다. 한국에 경우 2020년 매출액 기준 전국 1000대 기업 중 753개 사가 수도권에 몰려 있고, 매출액의 86.9%가 수도권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기업이 비수도권에 위치할 경우 인재도 없고 인프라도 열악하고 또 수도권에 위치한 다른 경쟁사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 비즈니스 단위가 작아져 기업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하노버에 살게 되면서, 뉴햄프셔주와 버몬트주의 주민들처럼 주말 아침에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가 운영하는 베이커리에서 가끔 아침식사를 하곤 한다. 사원수가 400명인 이 기업은 버몬트주 노르위치라는 '깡시골'에 본사를 두고 있고 본사 옆에 베이커리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 비수도권인 부산, 대전 등의 주요 도시와 비교해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 기업은 밀가루가 주식인 미국에서 밀가루 판매 부문 전국 2위, 수익 부분에서 전국 1위를 차지하는 푸드 컴퍼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는 올해 231년이 되는 미국 최초의 밀가루 회사이다. 이 회사는 미국 제빵 역사와 처음부터 같이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제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영부인 마르타 워싱턴이 18세기 후반에 애플파이를 최초로 선보였을 때도, 1905년 뉴욕에서 미국 최초의 핏제리아가 탄생했을 때에도, 1933년 메사추세츠주 위트먼 톨 하우스 여관 주인이 초콜릿칩 쿠키를 처음 발명했을 때에도 이 회사의 밀가루가 함께 했다고 한다.
킹 아서 베이킹 회사는 1790년 보스턴 롱 와프에 처음 문을 열었는데, 최초 이름은 헨리 우드 앤 컴퍼니였다. 이 회사는 동부 13개 주 뉴잉글랜드의 최초의 푸드 회사였다고 한다. 1790년은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었는데,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동부 13개 주에서는 영국의 상품을 보이콧하는 일이 많았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는 질이 좋은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전무했었고 당시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보다 빵 의존이 훨씬 높았기 때문에, 독립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영국 밀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핸리 우드 앤 컴퍼니는 영국에서 질 좋은 밀가루를 수입하여 팔았다. 미국 농업 인프라가 점점 발전하면서 밀 농이 점차 확산되고 이리 운하가 건설되면서 운송이 자유로워지자 회사는 1820년 대부터 미국산 밀로 만든 밀가루를 팔기 시작했다.
킹 아서 밀가루가 '킹 아서'로 공식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1896년 보스턴 푸드 페어에서였다. 순수하고 정직하며 질이 높은 제품 생산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는 의미에서 아서왕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970년, 킹 아서 밀가루 회사는 뉴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푸드 공급사가 되었고, 1790년 보스턴에서 문을 연지 거의 200년 만인 1984년에 지금의 버몬트주 노르위치로 본사를 옮겼다.
이렇게 대도시가 아닌 버몬트주 노르위치로 본사를 옮긴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는 2000년에는 베이커리를 오픈하고 베이킹 교육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전 직원들이 주주가 되는 사원주주회사로 변경하였다. 노르위치에 있는 본사에는 현재 대형 베이커리가 있을 뿐 아니라 작은 박물관도 있어서 회사의 역사를 둘러볼 수도 있고, 베이커리 교실도 열고 있어서 지역주민들이 수업을 받을 수도 있게 된 것이다.
노르위치로 본사를 옮김으로써 버몬트주와 뉴햄프셔 주민들의 고용을 증진하고 커뮤니티에 대형 베이커리 카페와 제빵교실도 제공하며 모든 직원들이 주주로서 책임을 지고 회사를 운영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등 지속가능한 커뮤니티를 만드는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에 2007년에는 거버넌스, 직원, 커뮤니티, 고객, 주주, 환경에 착한 일을 하는 기업 리스트인 비 콥스 (B Corps)의 최초 멤버가 되었다.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와 같이 미국 전역으로 상품을 공급하는 기업이 스스로 작은 시골마을로 본사를 옮기고 소유주가 직원들에게 기업을 물려주어 지역경제의 주체들이 커뮤니티를 발전시키는 길을 택하는 것이 커뮤니티 기반의 경제학 (community-based economics)을 실천함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노블'함이 아닌가 싶다.
특히,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되자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의 진가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셧다운으로 외출을 하지 못하자 회사로 수많은 제빵 레시피 문의가 접수되었다고 한다. 홈페이지를 찾는 사람들은 부활절 이전 달인 3월에 하루 2-300백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1년 전 같은 시기보다 4-5배 증가한 수치다. 이에 전 직원들이 함께 모여 공급 체인과 인력을 재정비했다. 예를 들어 집에서 빵을 굽는 개인들을 위해 밀가루 포장을 소형화하여 납품했다. 제빵학교의 인력을 "베이커의 핫라인"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제빵 레시피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일을 하도록 재배치했다. 이런 발 빠른 대처로 기업은 1년 전 부활절 대비 무려 600%나 매출이 증가했다.
하지만 팬데믹이 정점에 이른 2020년 메모리얼 데이 때는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도 폭발하는 수요에 공급을 맞출 수는 없었다. 이에 회사는 과감히 가장 바쁜 시기인 이 휴가 주간 동안 셧다운을 하고 전 직원이 가족들과 명절 휴가를 보내게끔 하였다. 명절에 베이킹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것은 고객을 잃는 큰 리스크를 짊어진다는 것이지만, 놀랍게도 고객들은 브랜드 자산 관점에서 기업의 결정을 지지해 준 덕분에 이미지가 더 좋아졌다고 한다. 이렇게 기업은 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이브와 새해 전날 휴가를 제공했다.
코로나 끝무렵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 베이커리에서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 주말이 기다려진다. 베이커리 매장 내부로 들어가면 케이크 믹스, 잼 등과 같은 가공식품과 제빵에 필요한 도구도 판다. 애완견을 위한 비스킷을 만드는 툴과 믹스도 매장 한켠에 디스플레이해놓았다. 소비욕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제품을 팔고 있어서 나도 갈 때마다 케이크 믹스를 한 박스씩 구입하곤 한다.
며칠 전에 평소에 좋아하는 레몬 케이크 믹스를 하나 구입해서 집에서 만들어 보았다. 보통 대형 슈퍼마켓에서 파는 케이크 믹스보다 2-3배 가격 차이가 났지만, 밀가루라는 원천적인 재료를 공급하는 기업이기도 하고 안전한 재료를 사용하기 떄문에 당당하게 이런 가격을 붙일 수 있는게 아닌가 싶다. 배울 점이 많고 응원하고 싶은 기업이기에 구입하게 된다. 또, 가격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고급스러운 맛이 났다. 앞으로 하노버에 머무는 동안에 킹 아서 베이킹 컴퍼니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제빵 레시피를 활용해서 제빵 기술 좀 터득해 봐야겠다.
[참고자료]
https://www.kingarthurbaking.com/about/history
https://www.referenceforbusiness.com/history2/55/The-King-Arthur-Flour-Company.html
https://www.ft.com/content/c5e08da1-2174-497b-a100-ba5469a1434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