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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잎 Dec 24. 2024

<공연> 브래키에이션 리뷰

진화를 넘어선 움직임

서울숲 언더스탠드 에비뉴 아트스탠드의 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열린 공연 브래키에이션(Brachiation)은 단순히 인간의 진화 과정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는 진화라는 개념의 틀 안에서 지금의 몸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였다.



공연은 무용수들이 옷을 입으며 시작된다. 무대 위에는 다섯 벌의 옷이 걸려 있고, 무용수들은 하나씩 옷을 집어 들고 맨몸 위에 입는다. 그 후 움직임 없이 선 채로 반복적으로 행동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은 관객에게 과거의 잔상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는 위를 올려다보고, 누군가는 발가락을 까딱이며, 또 누군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이러한 정적인 움직임은 긴장감을 조성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무언가 거대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을 예고한다. 


폐쇄적인 공간의 특성은 관객과 무용수 간의 경계를 허물고 무대와 일체화된 경험을 제공한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단순한 무대는 무용수들의 몸짓과 빛의 변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빛과 움직임, 그리고 옷이라는 상징적 요소는 관객에게 ‘인류’라는 개념을 단순한 몸의 역사로 풀어낸다. 


공연의 첫 장면에서는 ‘브래키에이션(Brachiation)’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암시된다. 이는 과거 유인원들이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며 먹이를 찾기 위해 행했던 동작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단순한 이동의 방식을 넘어 인류의 초기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대 위 무용수들의 첫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원시적 이동 방식을 재현하며 시작된다. 이 모습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친화적 움직임’을 처음으로 실행했던 순간을 암시한다. 하지만, 원시적 춤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부여한 이름일 뿐, 실제로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작품의 해석은 열린 결말을 향한다.  



무용수들은 옷을 입고 난 후, 각각의 신체 부위를 격렬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발을, 목을, 숨을, 눈을 움직이는 행위는 몸을 구성하는 각 부분이 독립적으로 움직임을 갖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이 움직임은 단순한 춤을 넘어, 진화라는 과정에서 인류의 몸이 어떻게 기능적 변화를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무대 위에서 빛을 따라 달려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은 본능적인 생존의 움직임과도 같다. 이는 진화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시도와 선택의 결과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 작품의 중반부는 인류 진화의 대표적 상징인 직립보행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무용수들은 바닥을 기며 시작해 점차 허리를 펴고, 직립 보행을 연습하며 미래의 인간 모습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장면은 긴장과 희망, 그리고 중력을 거스르는 도전을 통해 진화의 어려움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무용수들이 서로를 끌고 밀며 나아가는 움직임은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협력과 갈등을 통해 변화를 이루어냈음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다소 비정하다. 패잔병을 끌고 가는 듯한 거친 몸짓은 인류 진화의 과정이 단순한 협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움직임은 더욱 극적으로 변한다. 무용수들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서로의 몸을 밟고 올라선다.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무용수는 손을 뻗어 사과를 따려 하지만, 이내 무대에 쓰러지고 만다. 이 장면은 진화가 반드시 성공과 진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진화 과정에는 낙오와 실패가 함께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작품은 진화의 의미를 단순히 진보로 환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 남은 무용수가 독무를 펼친다. 그의 움직임은 서투르고 혼란스럽지만, 점차 날개를 펼치듯 균형을 잡으며 자유로운 비행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 장면은 마침내 중력을 극복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인류의 모습을 상징하는 동시에, 진화가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이 아닌 정신적, 의지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그의 움직임 뒤에는 “이것은 진화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나타난다. 이는 이 작품이 진화 그 자체가 아니라, 진화를 통해 우리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묻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무대는 다시 조명이 밝혀지고, 다른 무용수들이 합류해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유려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다시 기어 다니고, 앉고, 서고, 뛰며 무대를 벗어나듯 퇴장한다. 마지막으로 무대 위를 맴도는 무용수의 거친 숨소리는 현재의 몸이 느끼는 모든 중압감을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https://youtu.be/imBlPXbAv6E?si=GSfK8pWaK1-nFZvn


무용수들이 모두 함께 뛰는 장면에서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EDM 듀오 다프트 펑크(Daft Punk)의 "Infinity Repeating" 뮤직비디오가 떠올랐다. 이 뮤직비디오는 인간 진화의 과정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며 ‘인간의 진화’를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공연과 맥을 같이한다. 특히, 뮤직비디오의 마지막에서 로봇 형태의 인류가 온 힘을 다해 뛰는 장면은 공연의 마지막에 무용수들이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작품 브래키에이션은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몸이라는 매체를 통해 인류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진화라는 거대한 서사를 단순히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과 움직임이 가진 현재성에 집중한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는 작품이다. "진화"는 그저 몸의 움직임이 남긴 흔적일 뿐, 관객 앞에 펼쳐진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몸의 이야기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하지만 그 질문에 답을 찾기보다는, 지금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는 데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3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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