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뜬 곳은 누추하고 악취와 오물로 뒤덮인 지하가 아니었다. 사방이 휘황찬란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정식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들어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밖에 서 있던 보초병이 정식의 불호령에 비뚤어진 갑옷을 바로 입고 쏜살같이 정식 앞에 자신의 몸뚱이를 준비시켰다. 병사는 감히 자신이 섬기는 왕의 용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바닥에 숙인 채 "왕이시여 부르셨습니까"라고 세상 떠나갈 듯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정식은 왕이다. 건장한 체격의 병사는 자신은 감히 눈앞에 있는 왕(정식) 보다 한참 열등한 존재이며 그걸 누구보다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정식이 알아달라는 듯이 다소 과할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병사의 행동에 뿌듯함을 느꼈다. 공연히 자신이 왜 이 병사를 불렀고 굳이 왜 소리를 질렀는지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 공간을 메웠다. 정식은 딱히 할 말이 없음을 민망히 여기는 와중 바깥이 시끌벅적하기에 병사에게 물었다.
"밖이 왜 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정식은 위엄과 부드러움 그 중간의 톤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지구상 최고존엄임을 넌지시 드러냈다.
"왕이시여 어찌 이리도 겸손하시다 말이십니까? 그것은 전쟁의 신인 당신께서 그 어렵고 험준한 러시아 원정에서 대승을 이루셨기 때문이옵니다." 병사는 한 인간이 어쩜 저리도 아름답고, 인품이 훌륭하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어쩜 저리도 잘 어울릴 수 있을까 하는 상찬의 눈으로 정식을 바라봤다.
'러시아 원정이라고?' 정식은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순간 그 이유를 깨달았다. 요 며칠 자신이 읽은 나폴레옹 전기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러시아 원정에서 패한 내용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워털루 전투에 대한 기억이 더욱 뚜렷하고 기억됐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사에게도 그 사실을 물었다.
병사는 당연지사 당신의 위대한 지략과 특출 난 신체 그리고 빛을 담은 용안 때문에 승리했다며 정식에게 온갖 아양을 떨어댔다. 그는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자신의 신하들의 얼굴을 마트에 있던 자들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 충실한 병사는 야채코너에 있던 키 크고 잘생기며 어깨가 태평양인 사내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달뜬 기분으로 정식은 침실밖으로 뛰쳐나갔다. 왕실 밖으로 나서자 그곳에는 프랑스풍의 마당이 주변을 보다 품위 있게 만들었다. 동양과 서양이 기묘하게 섞인 장식들이 왕좌를 더욱 영광스럽게 보이게 했다. 왕좌 옆에는 마트에서 선선함 태도와 아리따운 외모를 가진 계산원이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공손이 모으며 서 있었다. 나아가서 높디높은 왕좌 아래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계단 아래에서 목에 쇠사슬을 찬 중년 여성이 보였다. 그녀는 바로 맥주캔을 떨어뜨릴 때 송곳 같은 말투와 한숨으로 그에게 모욕감을 줬던 마트 여직원이었다. 정식은 순간 편집증적인 자신의 몽상이 수치스럽고 한심하다고 느꼈지만 양심이 보내는 신호를 애써 외면했다. 그는 어느새 자신의 옆예 있는 병사의 칼집에서 칼을 멋들어지게 뽑고는 쇠사슬에 묶인 죄인에게 달려가 온갖 모욕적인 말들을 토해낸 다음에 목을 배려했지만 도대체가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넘어갈 수 없다는 생각에 병사를 불러 그녀를 참수하라 명했다. 목이 잘린 그녀의 피가 분수처럼 튀어올라 정식의 옷과 얼굴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주변에는 피가 낭자했다. 정식은 몽상 속이었지만 머릿속이 멍해지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강렬한 태양이 그를 찌르고 있었다.
정식은 눈을 떴다. 백열등의 불쾌한 불빛에 그는 서둘러 실눈을 뜨며 빛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배가 고프지도 않으면서 찬장에서 라면을 손에 잡히는 대로 꺼냈다. 일회용 가스레인지에 반쯤 남은 부탄가스를 끼워 넣고 찌꺼기가 남아있는 냄비에 물을 넣고 물이 끓기도 전에 라면을 넣었다. 면이 익기만을 기다리며 정식은 바닥에 어정쩡하게 앉아 멍하니 끓고 있는 냄비만 바라봤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묘한 허탈함과 수치심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붙잡아 부검하기를 애써 외면했다. 그에겐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만약 그 감정을 붙잡아 곱씹는다면 자신의 냄새나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고 또한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심지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애초에 싹을 잘라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