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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희연 Jul 18. 2021

옛날 어린이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

에도시대 아동용 서적과 장난감



일본의 아동도서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일본은 문학의 전통이 매우 깊은 나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설로 평가받는 『겐지 이야기』가 이미 천년 전에 집필되었다는 점이 이를 잘 드러낸다. 그런 일본에서도 아동문학의 역사는 상당히 짧은 것처럼 느껴진다. 보통 1891년 간행된 이와야 사자나미의 『코가네마루』를 일본의 근대적 아동문학의 효시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가 때문에 이전까지 일본에는 아동을 위해 제작된 책이 없었던 것 같은 인상이 든다.

 

『코가네마루』의 표지 이미지(왼쪽)와 권두 삽화(오른쪽)


그런데 이렇게 근대문학을 표방했던『코가네마루』 속에는 이미 전통을 계승한 징후들이 가득 들어있다. 이미 에도시대 전기부터 일본에는 아동들이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인쇄매체가 존재하였으며 그러한 전통에 힘입어 『코가네마루』와 같은 책이 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타케우치 케이슈가 제작한 책의 표지를 살펴보자. 동화 속 주요 등장인물의 동세가 매우 뻣뻣한 것이 주목된다. 이는 인물이나 동물이 생명체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아이들이 흔히 가지고 놀던 종이인형을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동화책에 묘사된 대상들은 종이인형으로 제작될 만큼 널리 알려진 캐릭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편 책의 권두 삽화 또한 케이슈가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19세기 말 이전에 성립된 일본 삽화와 목판화의 전통적 어휘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에도시대 대중문화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권두삽화 속 주인공과 동료들이 착용한 의상을 보며 18세기 중반 이후 크게 인기를 누렸던 카나데혼 츄신구라*를 쉽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카나데혼 츄신구라: 1701년 겐로쿠 아코 사건을 바탕으로 한 가부키극과 인형극으로 1748년 초연됨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일본의 문화는 많은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전통으로 불리던 많은 문화유산은 혁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젊은 지식인들은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대중문학을 질타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의 선봉장이었던 사자나미와 같은 근대기의 문인들은 그렇게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전통문학을 유용한 자료로 활용해 근대 문학을 집필했던 것이다.


1986년 도쿄도정원미술관 개최 《일본 아동도서 역사전》

즉 『코가네마루』는 아동문학의 시발점이 아니라 이전까지 존재했던 전통의 시발점에 가깝다. 이 글은 그러한 일본의 전통적 아동용 도서와 놀이물을 조명한다. 메이지유신 이전 일본의 아동문학은 풍부한 결실을 이룬 분야였으나 '아동'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학계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분야이다. 1960년대 중반 도쿄도 신주쿠 이세탄백화점에서 15세기 이래의 아동문학을 소개했던 것이 아동문학과 관련된 가장 이른 전시라 할 수 있다. 이후 1986년 도쿄도정원미술관에서 개최된 《일본 아동도서 역사전》에서는 중세부터 1900년대에 이르기까지 간사이 지방과 간토 지방에서 출판된 여러 아동 관련 간행물을 광범위하게 소개하며 이 분야의 혁신을 이끌었다. 조금씩 성장해가는 이 분야는 특히 도쿄 호세이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아동 비교문학 연구자 앤 헤링(Ann Herring)의 노력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다. 이 글은 헤링의 연구를 바탕으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작품들로 가득한 에도시대 일본 아동문학의 세계를 널리 알리고자 한다.




에도시대 아동문학은 어떻게 성립했을까?

에도시대의 어린이들은 세계 어느 나라의 어린이들보다도 쉽고 일상적으로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아동을 위한 도서는 생각보다 오래된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니었다. 어린이를 위한 도서가 등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회적 조건과 경제적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아동에게 기본적인 교육을 제공할 능력과 의사를 가진 부모가 충분히 존재해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서적을 선호하는 문화적 합의가 요구된다. 아동이 출판물을 구입할 만한 경제적 안정성은 기본이다. 더 나아가서는 이러한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서적 출판 기술과 관련 업종의 성장도 필요하다. 19세기 이전에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국가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일본은 그중 하나에 해당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아동문학이 처음 발달한 곳은 간사이 지방이었다. 오랫동안 수도였던 교토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오랫동안 융성해왔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아동문학이 처음 각광받았던 것은 오사카의 상인계층을 통해서였다. 특히 오사카의 출판업자들은 자녀들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부모들의 욕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용 출판물의 시장성에 주목했다고 한다. 이렇게 교토와 오사카의 출판업자, 유통업자들은 에도시대 초기 아동문학 시장을 주도하며 당시 신도시였던 에도(오늘날의 도쿄)에도 분점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에도에도 아동문학이 유통되기 시작한다. 본래 간사이의 분점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에도 지역의 아동문학은 17세기 말 자체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에 이르면 18세기 중엽에 이르면 일본의 출판문화를 선도하게 된다. 그러나 간사이나 간토의 출판업체가 전국의 시장을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한 일본의 특징은 아동출판시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센다이, 나고야, 하카타에 이르기까지 열도 각지의 상인들이 아동과 관련된 출판시장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이들은 간사이나 간토 지역의 대형 출판업체에서 상품을 수입하기도 했지만 해당 지역에서 생산된 교과서를 유통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17세기 간사이를 중심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던 일본의 아동문학이 18세기를 기점으로 간토 지방에서 크게 융성하여 19세기에 이르기 전 이미 전국에 유통망이 형성되었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에도시대 어린이들은 어떻게 책을 접했을까?

에도시대 아동문학의 발달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는 바로 광고이다. 아동용 출판물에는 으레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가 아이들의 마음을 잔뜩 부추겼다고 한다.


이 책이 마음에 드신다면 저희 출판사의 다른 ○○
(책, 인쇄물, 종이에 인쇄된 게임이나 장난감, 교토에서 제작된 고급 문구류 등)
도 ●● 상점에서 판매 중이니 잘 살펴보세요.

1860년대까지 일본에는 신문이나 잡지가 없었다. 따라서 출판업자들에게는 출판물 내에 인쇄된 광고물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기가 내려가면 포스터나 광고 전단도 효율적인 광고 수단으로써 애용되었다. 18-19세기 그림에는 게시판을 이용한 광고 장면이 자세히 묘사된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러한 광고물 중에는 아동이 흥미를 느낄만한 내용을 주제로 한 책도 상당량 적혀있어 주목된다.


1777년 간행된 『미마스마스우로코노하지메』 제3장의 삽화(오른쪽)와 해당 광고의 실제 서적(왼쪽)


예를 들어 위 그림들 중 오른쪽의 목판 인쇄물은 책방을 보여주고 있다. 책방의 밖으로는 여러 간판들이 인쇄되어 있는데, 이는 모두 당시 실제로 간행되던 책의 정보이다. 즉 책방의 이미지 속 간판은 출판업자들의 광고를 위해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 중 가장 왼쪽에 적힌 책은 어린이들에게 크게 인기를 끌었던 모모타로 이야기(왼쪽 그림 참조)를 소개하고 있다.

이외에도 출판업자들의 광고는 마치 오늘날의 광고를 방불케 하듯 출판물의 가능한 모든 부분에서 확인된다. 책 본문 내용, 주인공들 간의 대화, 위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삽화 등 곳곳에 간접적인 내부 광고가 게재되었던 던 것이다. 특히 이러한 광고는 타깃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제작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어 화면 왼쪽의 작품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1850년 간행된 류테이 센카의 소설 『이마 나리하라 무카시노 오모카게』에 수록된 삽화로 새해 선물을 받은 두 소녀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화면 왼쪽에 앉은 나이 많은 소녀는 새해 선물로 받은 소설책을 즐겁게 펴보고 있는 반면, 화면 오른쪽에 쪼그리고 앉은 나이 어린 소녀는 언니가 읽고 있는 소설책에 삽화를 잔뜩 넣어 어린 소녀도 읽을 수 있게 제작한 그림책을 들여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다른 한쪽에는 아직 포장조차 풀지 않은 스고로쿠(쌍육) 게임판이 얌전히 놓여있다.

연령대에 따라 구매할 상품이 달라질 것을 감안한 일본의 출판업자들은 이렇게 나이가 많은 소비자에게는 그에 걸맞게 글의 비중이 높은 소설책을, 나이가 어린 소비자에게는 해당 소설에 삽화의 비중을 늘린 그림책 또는 이를 게임으로 만든 놀이판을 광고할 정도로 교묘하고 영리했다. 이러한 현상은 동시에 그만큼 아동과 관련된 일본의 출판시장이 다양했다는 것을 증언하기도 한다.


이처럼 에도시대 아동문학 광고의 내용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특히 직접적으로 책을 소개하는 내부 광고는 보통 책의 맨 끝에 서지정보와 함께 등장하는데 실제 구매력을 갖춘 부모를 타깃으로 하여 정중하고 간결한 문구를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아동도서의 구매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 어머니라는 점을 감안해 부인을 대상으로 한 건강 관련 제품이나 화장품과 아동도서의 광고를 연계시키기도 했다. 특히 아동도서로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의 광고에 어머니들이 구매할 법한 화장품이나 가족 전체가 사용할 수 있는 건강 관련 제품이 게재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당시 사람들이 선물이나 기념 등의 목적으로 구매했던 우키요에 다색 목판화에도 여러 아동용 인쇄물의 광고가 대대적으로 삽입되었다.


3대 우타가와 토요쿠니의 다색목판화 <하루 아소비 무스메노 나나쿠사>


예를 들어 위 작품(가운데)은 본래 신년이 되어 봄을 즐기는 여인을 그린 미인도로 제작되었다. 그런데 미녀가 안고 있는 어린아이가 손에 쥔 인쇄물들을 잘 살펴보면 스고로쿠라는 게임판을 양손에 쥐고 있다. 멋들어진 우키요에 그림조차도 이렇게 효율적인 광고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도시대 어린이라면 누구나 책을 볼 수 있었을까?

헤링에 따르면 이외에도 다양한 문헌에서 아동도서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문헌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여 일기를 필두로 비망록, 개요서, 수필, 연표, 연대기, 장부, 소설, 오락용 시, 인쇄물, 풍속화, 선물 목록 등에서 아동을 위한 책과 인쇄된 놀이물이 확인될 정도이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묘사한 책의 표지나 삽화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운 증언이다. 풍속화 중에서도 현실을 이상화하거나 전통적인 표현을 그대로 답습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유명한 주제를 묘사한 풍속화라면 그 속에 묘사된 장면이 당대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민속학적 자료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극히 평범하고 소박하게 일상을 묘사한 삽화에서 소품처럼 무심하게 다뤄진 요소들은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반영하였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소설 『우키요부로』의 삽화(왼쪽)와 어린이용 인쇄 장난감(오른쪽)


특히 19세기 초반 제작된 시키테이 산바의 대표작 『우키요부로』의 삽화에는 빽빽이 드러 선 인물들이 에도인들의 일상을 보여주고 있는데(왼쪽 그림) 배경적 요소로서 구석의 빈틈을 채우기 위해 그려진 여러 어린이들은 책을 읽거나 종이로 인쇄된 카드놀이, 보드게임(오른쪽 그림)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확인된다. 요컨대 에도시대의 어린이들이 이런 인쇄물을 놀잇감으로 삼는 것은 아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에도시대 어린이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에도시대 아동용 출판물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가를 통한 상업성, 시각요소를 활용한 오락성이다. 이러한 요소는 비슷한 시기 세계 아동문학과 비교되는 일본 아동문학만의 고유한 성질이다. 17세기 후반 간사이 지방에는 이미 세계 최초로 아동용 그림책이 대량 생산될 정도로 아동문학이 일찍부터 독립된 출판물 장르로서 성장해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가능했던 것은 일본에서 일찍부터 목판인쇄술이 크게 발달해 이미 17세기부터 전면 삽화를 시장가에 제공할 수 있었으며 18세기에는 다색 목판화의 상업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에도시대 아동용 출판물을 살펴보면 먼저 교훈성과 오락성이 함께 강조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17-18세기 일본의 아동용 교재 '오라이모노'는 19세기 유럽의 비슷한 교육용 출판물과 비교해보면 종교성을 배제하고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한다. 에도시대의 서적상들은 교육성과 오락성을 절묘하게 결합시켰다. 그 결과 에도시대의 교재는 설교적이고 교육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삽화와 같은 부수적 요소를 통해 어린이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1769년 간행된 수학교재 삽화(왼쪽)와 1849년 간행된 어린이 서적 『니주시코』의 삽화


예를 들어 에도시대의 아이들은 덧셈과 뺄셈을 익히기 위해 수학용 교재를 보면서 문제 아래에 삽입된 귀여운 생쥐나 이를 잡는 역동적인 인물들의 모습(왼쪽 그림)을 보며 지루함을 달랠 수 있었다. 에도시대 아동문학의 오락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로 『니주시코』(오른쪽 그림)를 꼽을 수 있다. 이 책은 본래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부모에 대한 자녀의 효도를 강조했는데 본국에서도 아동에게 의무를 강조하는 지루한 설교조로 비판을 받았을 정도였다. 일본에서 재간행된 이 책은 재주 넘치는 일본의 출판업자들을 통해 화려한 삽화와 일본어 주해를 덧붙여 재미있는 어린이용 도서로 재탄생했다.

이처럼 에도시대의 일본에서는 출판업자와 소비자 모두 아동도서를 단순히 교육적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양의 어린이용 도서보다도 일본의 어린이용 도서가 먼저 순수한 재미를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도서 광고에서도 확인되는 현상이다. 에도시대 출판업자의 광고물을 살펴보면 인기 가부키 소개 서적이나 수수께끼 놀이집, 단어 게임, 각종 퍼즐, 놀이 또는 취미 관련 정보 서적과 같이 순전히 오락을 위한 출판물이 위에서 소개한 아동 교육용 출판물과 나란히 소개되고 있다. 즉 에도시대에 아동의 교육과 오락은 결코 분리된 장르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에도시대 아동문학의 두 번째 특징으로는 성인용 대중문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류테이 타네히코나 바킨과 같이 유명한 소설가들이 직접 아동요 도서를 제작하거나, 이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은 아동용 출판물이 제작되었던 것이다. 특히 19세기 전반 타네히코는 11세기 초에 제작된 일본 고전소설 『겐지 이야기』를 각색한 소설 『니세 무라사키 이나카 겐지』를 집필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큰 인기를 누렸는데 그 여파로 에도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겐지'와 관련된 아동용 교육 작품이나 게임이 출판시장에 다수 등장하였다. 


고전소설 『겐지 이야기』를 모티프로 해 제작된 1857년의 게임판


한편 바킨의 대표작인 『난소 사토미 핫켄덴』은 앞서 일본 아동문학의 효시로 소개된 사자나미의 『코가네마루』와 유사한 점이 많아 일본 대중문학과 아동문학의 깊은 관계를 다시 한번 드러낸다.

이처럼 에도시대 아동문학은 동화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던 18세기 유럽과는 달리 소비자 또는 독자로서 아동을 적극 고려하였다. 아동의 작은 손에 알맞은 크기로 제작되거나, 동화적 요소를 잔뜩 사용하여 아이들의 구미를 당겼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인이 향유한 대중소설에도 동화적인 요소가 적극 차용되거나, 바킨과 같은 유명 소설가가 19세기 초에 이미 일본 동화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는 등 아동문학의 존재감이 상당했다. 이러한 현상은 모두 에도시대에 일본인들에게 동화가 그 자체로서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매우 친숙하게 여겨졌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하겠다.



아이들에게 힘을 주는 책

고전문학 『백인일수』를 바탕으로 한 어린이용 카드게임

살펴본 아동문학 및 아동용 인쇄물은 새해, 어린이날 등의 기념일 또는 천연두의 발병 등 위문 상황에서 아동을 위한 선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겐지 이야기』, 『백인일수』와 같은 고전문학작품의 표지를 새해, 여자 어린이의 날(3월 3일), 남자 어린이의 날(5월 5일) 등 특별한 기념일과 관련된 이미지로 장식해 이러한 날에 선물할 수 있는 판본을 별도로 제작할 정도였다.

한편 천연두에 걸린 아동에게 선물하는 책은 '베니즈리 에혼' 또는 '호소 에혼'이라고 불렀는데 가장 큰 특징은 천연두를 상징하는 붉은색 표지로 전체 책을 장정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부적처럼 기능할 수 있는 낱장의 붉은색 인쇄물을 병실 장식용으로 선물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천연두에 걸린 아동의 선물용으로 제작된 1803년의 책. 내부가 모두 붉게 인쇄되었다.


 이러한 아동 선물용 출판물은 출판업자들에게 상당히 큰 돈벌이가 되었다. 높은 상업성을 바탕으로 유명 작가와 판화가가 제작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판매고를 보다 높이기 위해 표지에 작가의 이름을 기입하는 등 아동용 출판물은 에도시대에 독립된 장르로서 큰 관심을 받았다.



정보를 잔뜩 담은 재미난 종이완구들

에도시대에 아동을 대상으로 한 출판물은 서적에 국한되지 않는다. 특히 '오모챠에', 즉 장난감 그림이라는 장르는 에도시대 후반부에 등장해 아동 소비자의 오락과 교화를 위해 제작되었다. 종이를 잘라내 조립하는 등 장난감으로 치부하기 쉬운 이러한 인쇄물에도 많은 정보가 게재되어 도서 대용품으로서 기능하기도 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먼저 주목할 것은 스고로쿠(쌍육)라는 보드게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쌍육 게임이라는 명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 게임은 위트 있게 작성된 텍스트와 매력적인 삽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논리적인 줄거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흥을 돋우는 우연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어 마치 오늘날 다양한 선택지에 따라 진행되는 컴퓨터 게임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1910년 제작된 스고로쿠. 도쿄 전차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스고로쿠의 이런 줄거리는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소설을 활용하는 등 매우 다양한 내용을 지니고 있어 이를 변형된 형태의 서적으로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 스고로쿠 게임 자체의 인기가 사그라들기 전까지 상당히 유명한 작가와 삽화가가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이렇게 정교하게 제작된 매력적인 게임을 통해 어린아이들은 여러 서적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런 인쇄물은 일반적인 서적의 부록과 같은 개념으로 제공되기도 했다. 먼저 '고칸'의 경우 여러 권이 한 묶음을 이루는 소설책인데, 이들 책자를 하나로 모으면 표지가 '쓰즈키 효시'라는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이어져 어린이 독자들의 수집욕을 부추겼다고 한다.

쓰즈키 효시. 여러 권의 표지를 쭉 나열하면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 완성된다.


이외에도 표지에 작품 속 등장인물이 종이인형으로 그려져 있는 소설책도 있었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잘라내면 종이인형에 옷이나 가발을 갈아입혀 놀이를 즐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1889년 제작된 종이인형


또한 책을 읽다가 지루해진 어린이는 조립식 완구가 그려진 면을 잘라 설명대로 완구를 조립하면 작은 장난감을 만들 수도 있었다. 


메이지 시대에 간행된 잡지 중에는 삽화가 포함된 아동용 정기간행물에 주기적으로 조립식 완구를 인쇄해 부록으로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 중 일부는 에도시대 조립식 완구의 디자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일본 어린이 종이 장난감의 오랜 역사를 잘 보여준다.

한편 이런 장르가 뒤섞인 듯한 인쇄물도 있다. 인쇄물을 잘라내 조립하면 작은 책자 또는 아코디언 형태의 그림책이 완성되어 이를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말부터 점차 인기를 잃어가던 이러한 아동용 장난감들은 20세기 초 사자나미가 담당했던 아동 잡지의 부록으로 제작되면서 20세기 이후로도 명맥을 이어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날 아이들을 위한 그림

이처럼 에도시대의 아동들은 이르면 17세기부터 자신들만을 위한 책과 인쇄물을 즐기며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통해 성장했다. 300여 년에 걸쳐 성장해왔던 이토록 매력적인 출판문화는 안타깝게도 1868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점차 소멸되었다. 내외부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이 시기에는 아동문학에까지 국제적 또는 정치적 요소가 개재된 보드게임이 제작되거나, 과학과 관련된 서적이 다수 출판되는 등 아동문학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형식상의 변화였다. 당시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권위를 높이기 위해 출판업계에 전례 없는 검열과 압력을 행사했다. 교과서의 내용과 출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 발 빠른 신생 출판업자들은 커다란 경제적 이권을 누릴 수 있는 교과서의 출판에 주목했다. 이들은 정부가 강조한 문명개화, 서구화 등의 주제를 적극 강조하였다. 1868년부터 1900년 사이에 과거의 아동문학계를 주름잡던 출판업자들이 전통의 구애를 받으며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해 대부분 소멸했던 것과 달리, 이러한 신생 업체들은 서양에서 수입된 기술을 적극 사용하는 동시에 필요에 따라 전통적 요소를 적절히 결합하였다. 앞서 살펴보면 『코가네마루』를 출간한 출판사 하쿠분칸은 이러한 메이지식 '신품종'의 대표주자였다. 즉 이렇게 서구화와 근대화를 강조하는 당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에도시대의 전통을 부정하고『코가네마루』를 일본 최초의 아동문학으로서 포장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월터 크레인과 콜로만 모저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삽화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일본에서 배척한 전통적 요소 중에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오히려 당시 일본인들이 적극 수용한 서양의 기법보다 더욱 '현대적'인 요소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이 시기 서양의 여러 개혁적 예술가들은 아동서적을 비롯한 시각미술의 여러 분야에서 일본의 화려한 다색 목판화에 영감을 받아 혁신적인 창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작 이러한 전통을 오랫동안 발전시켜왔던 일본의 교과서는 영국이나 독일의 출판물을 어설프게 모방하거나 잘못 해석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살펴본 것과 같이 에도시대 일본에는 아동이라는, 오랫동안 세계의 많은 곳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 상업적 출판물의 주요 소비층으로서 존중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한 아동 출판물은 흥미와 교훈을 모두 효과적으로 전달한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일본인들은 이렇게 풍부한 자산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외국 문물의 수입에만 열을 올리며 귀중한 전통을 잠시 잊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남의 것이 좋아 보여도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본의 전통적 아동문학의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된다.



* 참고한 글

Ann Herring, “The Hidden Heritage: Books, Prints, Printed Toys and Other Publications for Young People in Tokugawa Japan,” in Susanne Formanek and Sepp Linhart ed., Written Texts–Visual Texts: Woodblock-printed Media in Early Modern Japan (Amsterdam: Hotei Publishing, 2005): 159-197.


* 더 살펴볼 글

https://www.suginamigaku.org/2016/02/ann-herring.html

- Peter Kornicki, The Book in Japan: A Cultural History from the Beginnings to the Nineteenth Century (Leiden, Boston: Brill, 1998).

- 김동규, 「가족국가(家族國家) : 일본 메이지기 공화정치 붕괴와 제국주의 형성에 관한 소론」, 『정치와 평론』 24 (2019): 51-80.

- 김미진, 「일본 근세문학과 근대 아동문학—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의 『고가네마루(こがね丸)』를 중심으로―」, 『일본학연구』 60 (2020): 117-137.

- 허지은, 「17~19세기 조선관련 오라이모노(往來物)와 정보의 유통」, 『한일관계사연구』 71 (2021): 249-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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