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의 에로티시즘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광기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그림을 보면 종종 소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Meu Pé de Laranja Lima)>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주인공 제제가 "나는 벌거벗은 여자가 좋아(Eu quero uma mulher bem nua)"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유행가 '탱고(O Tango)'를 부르다 아버지에게 가죽 혁대로 맞는 에피소드이다. 그렇게 학대받으며 자랐건만 저런 인간도 아비라고 해맑은 장난꾸러기가 위로를 해주고 싶어 노래를 부르는데 자기 혼자 꼬인 마음에 부모라는 작자가 아이를 폭행하는 상황이 계속되는데 그게 너무 아픈 거다. 마지막 순간에 무너져내리는 잔혹한 폭군 아버지가 사실은 사악한 게 아니라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라는 게 이야기를 더 슬프게 만든다.
사실 쉴레의 그림을 보며 자꾸 저 장면의, 저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 건 그냥 쉴레가 벌거벗은 여자를 좋아할 것 같기 때문인 듯도 하다. 아니면 내가 읽은 책이 너무도 일천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근데 자꾸 생각나버려서 파블로프의 멍멍이처럼, 결국 에곤 쉴레의 그림을 보면 비슷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순수함, 나약함, 잔인함, 뒤틀림, 그 모든 것이 한데 뒤엉켜 찾아오는 슬픔.
에곤 쉴레의 그림은 적나라하고 음탕하지만 야하다기보다는 왠지 슬프다. 흥선대원군 뺨치게 보수적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는 잘 모르겠다. 탐닉적으로 갈망하는 눈동자, 무기력하게 뒤틀린 몸부림이 세상을 향한 슬픈 저항처럼 느껴진다.
왠지 가엾다. 애처롭다. 그냥 슬프다.
쉴레와 함께 언급되는 대표적인 화가는 클림트이다. 사제지간이었던 두 사람이지만 인생사만큼이나 작품도, 오늘날의 평판도 상당히 다르다. 클림트는 언제나 반짝거려서 누구든 잔뜩 사랑해줄 것 같고 단단하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있어서 굳이 내가 보듬어주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반면 쉴레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아서, 어디선가 행려병자로 발견될 것만 같이 위태롭게만 보여서.
실제로 에곤 쉴레는 꽤 독특한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의 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여동생을 누드모델로 많은 작품을 남겨 근친애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화가가 된 후에도 가난한 소녀들을 누드모델로 삼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쉴레의 그림은 에로티시즘뿐 아니라 기괴함, 광기를 담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쉴레는 실제로 정신병원의 의뢰를 받아 환자들을 스케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가들은 인물의 새로운 표현을 위해 정신병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즉 쉴레의 그림은 어떻게 보면 광기를 담은 게 아니라 정말 광인을 그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쉴레의 인생담도 범상치 않은 부분이 많으니, 좀 더 강하게 말한다면 광인이 광인을 그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www.tate.org.uk/tate-etc/issue-43-summer-2018/egon-schiele-crazier-than-i-look-gemma-blackshaw)
천재적 예술가 하면 요절을 했을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쉴레도 예외는 아니다. 단 그가 사망한 이유는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 때문이라고 한다. 팬데믹의 한 복판에서 쉴레의 그림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