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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살의 <팔레트>

나이가 들면 취향이 견고해진다나 뭐라나

by 동치미 Mar 26. 2025

아이유 님은 25살이 되었을 때 <팔레트>라는 제목의 노래를 만들었다. 가사에는 '진한 보라색'이나 '반듯이 자른 단발', '빼곡히 채운 팔레트' 등 이런저런 것들이 좋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태어나서 25년을 살았더니 나를 좀 알게 됐는데, 나는 이런 것들을 좋아하더라' 정도의 내용이 되겠다.


그냥 무던한 성격이었던 건지 아니면 사람들에게 맞춰주는 게 특기였던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스물다섯 살 때도 취향이라는 게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축구보다 농구가 좋고, 맨유에서 뛰는 박지성 선수가 좋았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비교적 나는 회색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차츰 나이를 먹으며 데이터가 쌓이니 취향이라는 게 아니 생길 수 없었다. 이래저래 몸에 안 맞거나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을 발견했고, 체형(이라고 쓰고 살집이라고 읽는다)이 변화해가면서 옷도 펑퍼짐한 티셔츠 종류로 단순해졌다. 처음에는 싫어하는 것을 빼갔는데 나중에는 좋아하는 것 몇 가지가 남아 취향이 됐다. 예를 들면 카페에 가면 따뜻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나 비건 라떼를 마시고, 음악은 여성 인디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고, 양말은 흰색 장목을 선호하는 식이다. 앞으로도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이런 취향은 점점 견고해져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취향을 양보해야 할 때가 있으니 타인과 무언가를 함께해야 할 때다. 사무실 사람들과 카페를 고른다거나 회식 메뉴를 택할 때, 친구와 함께 볼 영화를 선정하거나 여행지를 고를 때 그렇다. 특히 누군가와 새롭게 가족이 된 경우에는 취향의 대충돌이 일어나는데, 아무리 준비 기간이 길다 해도 갈등이 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와 가족이 된다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운석이 떨어진 충돌의 폐허가 시간이 흘러 멋진 산이 되듯, 갈등은 또 다른 적응을 가져온다. 싫어하는 것도 해보기도, 좋아하는 걸 권유하기도 하면서 포기와 고수, 타협의 세 가지 전략이 사용된다. 공동의 취향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각자의 공간을 존중해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한 명은 거실에서 야구 하이라이트(타이거즈 화이팅)를 보고 한 명은 방에서 드라마 요약본을 보게 되는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스물다섯보다는 꽤나 나이가 많은 내가 <팔레트>를 만든다면 가사로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제목도 팔레트 말고 '장목양말' 같은 걸로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는 나만의 <팔레트>를 쓸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먼저 자고 있는 가족을 깨워서 같이 써야 하나. 아니다. 이미 대충 다 알아서 그냥 내가 쓰면 된다.

오오오~ 알라킷, 암 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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