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다섯째 날 새벽이 밝았다.
심지어 오늘부터는 아딧타나 라고 하여, 가부좌를 틀고 한 시간 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을 가지는 수행법의 첫날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세 번, 아딧타나를 명상홀에서 함께 수행한다고 했다. 어제의 실망감으로 인해 아딧타나고 뭐고,, 의지가 많이 꺾인 상태에서 명상을 시작했다.
어라? 어제까지만 해도 잘 잡히지 않았던 온몸을 감싸며 미세하게 떨리는 진동들이 느껴졌다. 내 몸에 이런 감각들이 있었다고? 내 의식을 몸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부분의 진동이 느껴졌고, 수행법대로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양동이로 물을 붓듯이 쏟아 내린다고 생각하며 의식하니 그 진동이 그 순서대로 느껴지는 게 아닌가!
와! 실눈을 뜨고 앞에 가부좌를 틀고 핀 조명을 받고 있는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 보니, 아니 이보다 더 자비롭고 진실할 수 없는 형상을 하고 땋 하고 앉아 계신 게 아닌가!...ㅎㅎㅎ 외부의 세상은 그대로임에도 내 마음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보게 되는지, 마음이라는 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직접 체험하며 느끼고 있었다.
그 미세한 진동들을 느끼는 건 내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다시 한번,,, 하면서 집중을 하면 여지없이 그 감각이 잡히지 않았다. 명상 수행법을 알려줄 때 평온하고 조용한 마음으로 감각해야 한다고 했거늘, 나의 마음은 그 느낌을 잡고 싶어서 들떠 있구나 싶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대를 내려놓고 그저 가만히 관찰하니 다시 그 감각이 잡혔다.
사실 위빳사나 명상의 핵심은 알아차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고 했다. 내 기분을 좋게 만드는 미세한 진동들이나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다리가 저리거나 아픈 감각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반응하지 않는 훈련이었다. 자기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갈망을 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감각은 혐오하게 되는데 그 경험들이 무의식에 계속해서 쌓이면서 갈망에 끄달리고 혐오를 피해보겠다며 괴로움 안에서 사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인 모든 것은 생겼다 사라지고, 태어난 것은 죽는다는 아닛짜(Anicca), 그러니까 모든 것은 변한다는 무상의 법칙의 이해를 가지고 반응하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이 괴로움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상의 법칙을 잊지 않고 지켜보려 하다가도 기분 좋은 그 진동들이 감각되면 잠시 또 평정심을 잃고 집착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 갈망하지 않기로 했는데! 하며 다시금 평정한 마음으로 끄달리지 않게 나를 붙잡았다. 그런데 문제는 반가부좌 때문에 계속해서 올라오는 다리의 저림 증상, 괴로움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며 혐오하지 않는 일이었다. 20분 정도까지는 아무렇지 않다가 조금씩 왼발에 눌린 오른쪽 허벅지가 저려오기 시작했다. 자세를 바꿔 앉지 않아야 하는 아딧타나 수행법 중이니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다. 하지만 다리가 퉁퉁 부어오르는 느낌이 날 정도로,, 이러다가 조금 있으면 다리가 진짜 터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버텨봐야지 하니 식은땀이 흐르고 다리가 달달 떨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진짜 터지면 명상홀 전체가 내 다리 파편들로 엉망진창이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스치며 다리를 풀었다,,;;; 생각해 보니 평정한 마음으로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있던 게 아니라 온몸과 마음을 다해 저림이 풀리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고통을 아주 넘치게 혐오하는 중이었다. 허허. 다시 자세를 고쳐 반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객관적으로 그 고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래,, 무상의 법칙,, 생겨난 이 고통도 어차피 사라진다,,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거,,,는 개뿔 ㅠㅠ 또 다리가 터질 것 같아서 다리를 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부위에서 느껴지는 간지럽거나 미세한 진동이거나 하는 감각들이야 뭐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도 되고 실제로도 그렇게 체험되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발이 다른 다리를 누르고 있어서 생기는 저림 증상이 사라진다는 게 진짜 말이 되겠냐고,, 하는 의심이 또 스멀스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일 점심시간에는 신청자에 한해 5분씩 선생님께 질문할 수 있는 개인면담이 가능했다. 나는 면담을 신청해 그 눌려서 생긴 저림도 사라지는 게 맞느냐고 여쭈었다. 선생님은 그렇다고 하셨다. 의사가 자신의 몸이 아닌 환자의 상처를, 고통을 지켜보듯이 객관적으로 지켜보라 하셨다. 머리로는 납득이 안 됐지만 다시 시도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시작된 오후 명상은 오롯이 그 고통을 지켜보는, 그 고통을 평정한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오롯이 써보기로 했다. 몇 번의 시도에도 나아짐은 없었고 다리는 터질 듯 저리기만 했다.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고 인내심도 바닥이라, 아,, 이젠 못하겠다,, 모르겠다,,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는 마음으로 또 팅팅 부은 듯 저린 허벅지를 관찰했다.
그런데 분명히 내 발에 눌려서 돌처럼 단단하게 부은 느낌이던 허벅지가 쪼개지고 분열되며 스프레이처럼 미세한 입자들로 바뀌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라? 그러자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여전히 발이 누르고 있음에도 편안했다. 아니??? 선생님!!!!!! 하며 실눈을 뜨고 앞을 보니 역시나 자비로운 자태를!!!ㅠㅠ 머리로는 여전히 이해가 안 됐지만 몸으로 직접 경험한 것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이제 고통마저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구나!! 하는 오만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후로 몇 번 시도했음에도 스프레이 입자들처럼 쪼개지며 저린 고통이 깔끔히 사라진 경험은 사실 그때 한 번 뿐이었다.
수련이 반복될수록 나는 기분 좋은 감각에도, 또 불쾌한 감각에도 덜 반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7일 차쯤에는 한 시간을 앉아서 자세를 바꾸지 않고 가만히 명상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마음에 갈망이 생기려 하거나 혐오가 들어서려 할 때는 아닛짜 아닛짜 아닛짜를 되뇌며 평정한 마음을 되찾았다. 감정과 기분의 진폭이 점점 줄어들며 잠잠해지기 시작했고 며칠 남았는지 손을 꼽으며 세던 일들도 없어졌다. 이제부턴 한 주를 더, 아니 한 달을 더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해도 그럴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편안했다.
아침에 일어나 두 시간 명상을 하고, 아침을 먹고, 또 세 시간 명상을 하고, 점심을 먹고 산책하고, 다시 세 시간 명상을 하다 또 산책을 하고 쉬었다가, 또 한 시간 명상을 하고 또 고엥까 선생님의 법문을 듣고 다시 명상을 하고 씻고 자는, 이 반복하는 일상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읽지도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명상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지는 하루하루의 날씨를 온전히 느끼며 산책하는 일뿐이었다.
정해진 산책 코스를 하염없이 걷는 일이 운동도 금지된 이곳에서 명상 외에 할 수 있는 활동이었는데, 그 멍하니 걷고 또 걷는 시간 속에서 내가 살아오며 경험한 것들 결정한 것들 이루고 또 잃은 것들이 수 없이 조립되고 해체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지 하는 그간 쌓아왔던 생각들이 자연스레 정렬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가 기본학교에서 최진석 교수님께 듣고 배웠던 그대로
순간 모든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고 왜 그 사건들이 왜 그 사람들이 왜 그 결정들이 나의 삶에 존재했었는지가 스스로 설명되며 드러났다.
나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면 되는지를.
마치 이미 살아본 삶마냥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