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연희동에 온 이유는 이곳이었다.
쇼룸 문을 열고 들어서니 공간은 돌과 고목, 자기들이 어울러 있었다.
정면에 놓여진 오브제가 시선을 붙잡았다. 누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쪼그려 앉아 오브제와 눈높이를 맞췄다.
살짝 숙인 고개와 살며서 포개어 마주 잡은 손, 그리고 양다리를 포개 얹어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아 그 작품은 저희 남편인, 작가님이 만든 붓다상이에요"
사장님처럼 보이는 인상 좋은 여성분이었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정도의 거리에 서서 작품을 설명해 주셨다.
"남편이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런 분위기를 좋아해서요.. 그래서 직접적으로 붓다상이 보이게 하기보다는 본인이 그림을 그렸던 종이들을 위에 덧붙여서 이렇게 표현을 했어요.."
너무 많지도 그렇다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정도의 완벽한 정보를 내게 남기고 사장님은 사라지셨다. 종교는 없지만 붓다상을 좋아하고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적절한 세일즈 멘트를 남기고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셨다.
한참을 쪼그려 앉아 오브제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만히 그리고 한참을 그곳에 있었다.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있는 붓다상이 보였다.
무언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겉으로는 형상만을 볼 수 있었지만, 그 안에 있는 붓다상이 보였다.
그 순간, 위빳사나 명상센터에 가서 열렸던 가슴 아래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명상센터에서 열렸던 이후로, 내가 현재를 전체적으로 감각하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가슴 아래의 그 지점에서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 이후로 나는 내가 현재를 전체적으로 살고 있는지를, 이 신호를 통해 인지하곤 한다. 그런데 붓다상 앞에서 그 부위에 불이 켜졌다.
멋진 작품이었다. 표현하려고 했던 메세지도, 그리고 표현법도.
구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유는 조금 달랐다. 너무 아름다운 작품이라 구매해서 집에 두고 모시듯 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내가 흙을 만지고 자기를 다루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을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미루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작품을 집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서른 살을 앞둔 어느 날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어떤 선수가 2루타를 날린 그 순간 불현듯 자신이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뭐 그런 비슷한. 맥락 없이 갑자기. 나도. 흙을 만지고 자기를 다루겠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최근에 나는 흙을 만지고 싶다. 흙냄새를 맡고 싶다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자주 썼다.
창업을 한 지 15년 차다. 돌이켜보니 주로 의사결정을 하는 나는, 직접 무언가를 내 손으로 만들어 본 기억이 없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제품 기획을 하고, 마케팅 전략을 짜도 내 손으로 직접 만지고 주물러서 만드는 무언가는 늘 없었다. 최근에 나는 흙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였는지 일 년 전에 집에 주문해 놓은 지점토 세 덩이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최근에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나는 죽으면 다시 흙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그 흙에서 새로운 생명들도 태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흙. 그 흙으로 만드는 무엇이었다. 자기瓷器는.
이 이유는 그 쇼룸을 떠나고 나서야 한참 뒤에 떠오른 것들이었고, 그 자리에서는 아무 이유 없이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구매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전시 중이라, 전시를 마치고 2주 뒤에 집으로 보내주실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나는 집 근처의 도자기 클래스를 찾아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