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랑> 시사회 리뷰
· 브런치 무비패스로 감상했습니다.
· 공식 소개 외의 줄거리 설명이나 스포는 없습니다.
남북한 정부가 통일준비 5개년 계획을 선포한 후, 강대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고, 민생이 악화되는 등 지옥 같은 시간이 이어지고 있는 혼돈의 2029년.
영화 공식 소개의 앞 단 내용이다. 김지운 감독이 <인랑>의 디스토피아적 배경으로 현실의 대한민국 정세를 활용한 선택은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여겨진다. 작년 8월 경이었다는 영화 촬영 시기의 국내 정치, 외교 현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개봉 전부터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인랑>의 원작은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견랑전설'(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인랑')이다. 이 일본 원작의 배경은 2차 대전 이후 압축성장에 따른 부작용으로 혼란에 빠진 가상의 일본 사회다. 얼핏 봐도 원작과 각색한 영화의 배경 사이에는 아시아 국가 내 혼란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비슷한 코드를 뽑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이 작품을 원작에 충실하다거나 그럴듯하게 재현한 실사 영화로 받아들일 만한 이유는 없었다. '미장센'의 대가로 유명한 김지운 감독의 작품답게, 원작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그의 설명대로 <인랑>은 특유의 중무장 갑옷과 빨간 두 눈이 강렬한 '이미지'만을 차용했을 뿐이다. 그 안에서 이 영화는 '한국' 감독의 의도대로 대한민국의 정세를, 국가 기관 간의 권력 다툼을 주인공들의 고뇌를 통해 풀어내려 한 흔적이 매우 짙었다.
문득 마모루 감독의 대표작 '공각기동대'의 국내 배급을 놓고 잡음이 많던 90년대 한국의 문화 풍토가 떠오른다. '왜색이 짙다, 선정적이다' 라며 그러한 일본의 대표작들이 청소년에게 유해하다는 지적들이 많았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처음 접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퀄리티에 감탄하면서도 어쩐지 께름칙했던 기억마저 떠오른다.
굳이 구시대적이고 촌스러운 얘기를 꺼낸 건 내가 <인랑>의 원작을 보지 않았더라도 그 기저에 깔린 '일본적 정서'와 국내의 문화적인 간극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는 변을 깔아놓기 위함이다. 이에 따라 나는 어쨌든 감독의 전작들과 작품세계, 배우들의 열연을 존중함에도 이 영화가 반드시 사무라이 투구를 닮은 중무장 병기를 앞세운 일본 원작에서 출발해야 했나 라는 진한 의문과 아쉬움을 먼저 밝힌다. 남북의 정세를 현실적이고도 영화적으로 잘 풀어냈다고 생각하는 영화 <강철비>와 비교했을 때 느껴지는 현격한 차이만큼이나 나는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인랑>의 스토리를 좇았다. 화면 가득 펼쳐진 액션씬들을 통해 스토리의 당위를 뛰어넘는 영화의 재미를 찾느라 헤매야 했던 것이다.
누굴 원망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제일 억울해
극 중 국가 기관들 사이에서 이용되고 방황하는 이윤희(한효주 역)의 심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다.(관객들은 과연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
실은 할머니도 소녀도 늑대에게 잡아먹혔다는 잔혹동화 빨간 모자 이야기를 임중경(강동원 역)에게 해주며 자신의 고뇌를 음울하게 표현하는 이윤희. 이 장면에서는 원작이 지녔을 특유의 분위기라든지 묵시록적인 메시지가 간접적으로나마 와 닿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또 다른 명작 '몬스터'에서 잔혹한 동화 묘사를 반복하며 주인공들의 갈등과 독자의 긴장을 극대화시킨 기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이윤희는, 아니 배우 한효주는 작품 내에서 지나치게 갈팡질팡했다. 투사라고 보기에는 부족하고,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하기에는 감정선이 모호한 채, 배우 한효주가 노력한 <인랑>의 이윤희는 임중경의 '짐'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배우 정우성을 꽤 좋아한다. 그가 출연한 김지운 감독의 대표작은 단연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라고 생각한다. 광활한 서부 벌판에서 말을 타고 달리며 장총을 철컥이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연이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익숙함 덕도 있겠으나, 반드시 김지운 감독이 아니었더라도 정우성은 <인랑>의 특기대 훈련소장 역할에 캐스팅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아쉽게도 영화 후반에는 <강철비>의 정우성이 그리웠지만, 어쨌든 특기대 최정예 요원인 '인랑' 임중경을, 배우 강동원을 컨트롤하고 때로는 제압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그가 아닌 배우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주인공 임중경을 연기한 강동원, 작품마다 '잘생김'을 연기하는 그는 이번에도 역시나 그랬다. 그가 쓴 특기대의 헬멧이 다른 사람에게는 과연 맞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강동원의 비주얼은 지극히 영화적이다. 30kg이 넘는 강화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역을 쓰긴 했으나 그가 직접 입고 연기한 인랑과 그렇지 않은 인랑의 '태'는 딱 봐도 달랐다는 감독의 회고가 마케팅용 칭찬만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다만, 개인적으로 나는 임중경이 중무장을 하고 보인 액션보다 오히려 훈련 중에 선 보인 맨몸 액션이 훨씬 좋았다. 중무장한 인랑의 모습은 마치 캡틴 아메리카가 아이언맨 수트를 입고 애쓰는 격으로 보였다고나 할까. 꽤 유명한 해외 스탭들까지 동원해 제작했다는 수트는 90년대 원작 애니메이션에는 충실했을지언정 2018년 영화의 수트로서는 그리 신선할 수 없던 것이다.('이게 다 마블 때문이다'라는 국내 영화인들의 호소가 어쩐지 들려온다) 그럼에도 영화의 상당 부분이 중무장하지 않은 상태의 임중경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전우치>에서 그랬듯 역시 강동원은 어떤 배우보다도 비현실적인 판타지, SF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만찢남'이라는 사실은 어쨌거나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친절하게도 영화의 공식 프로모션 컷들에는 <인랑>을 둘러싼 세 기관, 특기대-섹트-공안부에 대한 설명과 중심인물들이 잘 드러나 있다. 영화 초반에 다소 길다 싶을 정도로 관객들을 '학습시킨' 2029년 대한민국의 정세에 대한 내레이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원작의 배경 묘사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이 역시 단순히 비교하기는 힘들겠지만, 일본 원작에 한국적 설정을 입히며 드러나는 한계를 설명만으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듯하여 다소 아쉽다. 원래 훌륭한 showing에는 telling이 필요하지는 않은 법이니까 말이다.
인간 병기 '인랑'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감독이 심혈을 기울였을 지하수로에서의 전투씬은 물론 인상적이었다. 다만, 여기서도 한 가지 의문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음을 마지막으로 토로한다. 영화의 초반 섹트를 진압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든 특기대의 압도적인 화력에 비해 후반에 임중경 홀로 공안부 대원들을 상대한 전투씬이 너무 유난스러웠기 때문이다. 극의 긴장도를 높이고 인랑의 분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함이었을지는 모르겠다만, 덕분에 나는 '구식' 아이언맨을 떠올려야만 했다.
'인랑'의 독특한 마스크를 보고, 그가 쏘아대는 중화기 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느새 나는 '아이언맨 1'에서 토니 스타크가 처음으로 장착한 마크-1 수트가 생각났던 것이다.(또다시, 이게 다 마블 때문이다)
시사회 이후에 쏟아지고 있는 아쉽다는 평들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한국형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한 배우들의 열연이 궁금한 관객이라면 <인랑>은 참으로 모험적이고도 용감한 영화로 느껴지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다 보니 한 번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공안부 소속의 한상우(김무열 역)가 악역에 지나칠 정도로 충실했던 것도 <인랑>이 아무튼 뚝심을 잃지 않은 영화로 평할 만한 근거라면 근거다.
일본은 애니메이션을 참 잘 만들고, 미국은 영화를 참 잘 만든다. 하지만 이들의 뛰어난 수준은 상대적 비교점이 될 수 있을지언정 평가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영화, 대중 예술이야말로 강대국들에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대한민국의 정세를 닮았다. 그러게, 닮아도 너무나 닮았다. 과연 우리는 누구를 원망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