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를 보다가 문득
TV 채널을 돌리다 격투기 중계에서 멈췄다. 그날따라 박진감 넘치고 재밌어 보여서 한참을 봤다. 링 위에서 사내들의 주먹과 발이 부딪치고 얼굴에서는 피가 튀었다. 죽기 살기로 싸우는 그 모습이 마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아프리카 초원의 맹수와도 같았다.
유튜브 쇼츠를 넘기다 길거리 싸움 영상을 봤다. 대체 시비가 왜 붙었나 몰라도 남자 둘이 맨손으로 치고받고 싸우는 꼴이 격투기 못지않았다. 물론 프로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막싸움이었지만, 서로 죽일 듯 달려드는 기세만큼은 맹렬하고 사나웠다.
세상에는 역시 '룰'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서로 죽일 듯 싸워도 격투기 선수들은 파이트머니를 받고, 길거리 싸움꾼(?)들은 서로에게 깽값을 물어줘야 할 게 아닌가. 애초에 허용된 싸움판이 아니라면 남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돼 있으니 말이다.
중세를 지나 근세까지도 서양에서는 결투가 허용돼 있었다.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이 불과 1837년 결투를 벌이다 사망한 일화는 유명하다. 얼핏 듣기론 아내에게 치근대던 남자와의 치정 문제였다고 하니, 얼마나 죽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기도.
그게 법이든 조례든 암묵적 규율이든, 사회 구성원이 정해 놓은 기준이 시대에 따라 바뀌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다만 우리 모두는 현재라는 강물에 몸을 담고 있기에, 지나간 물줄기를 붙잡아 보려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일.
사실 같은 시대라 해도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법과 규칙은 천차만별이므로 인간 세상에 절대적인 룰이란 건 생각보다 많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내가 굉장히 합리적이라 믿고 있는 룰도 단지 내 인식 안에서만 당연한 것일지도.
세상살이 중요한 건 역시 내가 적용받는 룰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왕이면 그 룰 안에서 자기가 이길 만한 수를 더 많이 알면 좋을 테고 말이다.
TV 채널을 또 돌리니 이번엔 뉴스가 나왔다. 각종 룰과 룰 사이에서 수많은 이들이 룰을 지키고 어기고, 서로 이기고 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다시 격투기 중계 채널을 틀었다.
어릴 땐 잘 몰랐는데, 좀 잔인해도 차라리 단순한 걸 보는 게 마음 편해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