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패스 첫 번째, 참 괜찮은 힐링 영화
★★★★☆
* 본 리뷰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임순례 감독이 만든 일본 원작의 힐링 영화.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기 전 내가 알고 간 전부는 그랬다. 사실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음을 먼저 고백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이후로 딱히 감독의 영화를 챙겨본 적이 없는 데다, 일본 원작의 감성을 살렸을 거라는 추측에 더해 포스터에서 환히 웃는 주인공의 이미지로 미루어 '소녀 감성' 이 충만한 영화일 거라고만 짐작했기 때문이다.
어, 벌써 끝났네?
역시 예단은 금물이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달랐고, 마지막은 더욱 달랐다. '벌써 끝나다니' 란 생각은 서사의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 영화의 몰입도가 생각보다 많이 높았기 때문에. 둘째, 그만큼 스토리가 잔잔하고 일상적이라 어떤 '사건'이라 할 만한 클라이막스가 없이 끝났기 때문에. 요컨대 리틀 포레스트는 잔잔한 내용만으로 관객을 충분히 매혹시켰던 셈이다.
영화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건 단연코 주연 셋의 케미였다. 극중에서든, 배우로서든 여러모로 세 인물의 조합은 최근 본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SKT 광고에서 '응?' 했다가 영화 <1987>에서 '오~' 했던 배우 김태리(극중 혜원)가 이번 영화에서 '우와!'였다(안 본 영화 '아가씨'를 찾아보고 싶을 만큼).
혜원의 단짝 은숙을 연기한 배우 진기주도 최근 얼핏 본 드라마 <미스티>에서 '음?' 했다가 이번 영화에서 완전 팬이 됐다. 류준열(극중 재하)은, 영화 <더킹>에서의 나쁜 연기와 <택시 운전사>에서의 착한 연기 모두가 마음에 들어 참 입체적이고 좋은 배우라고 이미 생각하던 차에 <리틀 포레스트>를 통해서는 <택시 운전사>에서 보여준 순박함의 연장선상이자 새로운 '평범함'의 매력을 느꼈다. 드라마 '응답하라-'는 잘 안 봐서 모르겠지만, 역시 혜리가 자꾸 생각난 건 어쩔 수 없어서 영화 외 잡념을 떨치려고 약간 신경쓰기는 했다. 여러모로, 부럽긴 부럽다.
세 인물은 저마다의 배경에 따라 영화의 스토리를 균형 있게 쌓아간다. 장소적 배경인 시골 마을에서 자란 셋은 각각 '벗어나려다가 돌아온 / 벗어나고 싶은 / 벗어났다가 돌아온' 청년들을 대표한다. 이는 곧 감독이 '힐링'의 대상으로서 취준생과 직장인, 더 넓게는 지방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시선을 담아낸 영화라고 보여졌다. 취준생이기도 했고 직장인이기도 했던, 그리고 지방과 서울 모두에서 살아봤던 나로서는 공감의 교집합 영역이 상당히 넓을 수밖에 없던 이유다.
내용에 대한 스포가 없도록 쓰는 리뷰이므로 인물들 간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자제해야겠으나, 이 말만은 하고 싶다. 여자 둘, 남자 하나인 친구들 사이에서의 이야기를 그릴 때 자칫 생길 수 있는 위태로움과 불균형이 이 영화에는 없다. 청춘 남녀들이 이끌어가는 스토리에서 그런 욕심을 참기란 좀처럼 힘들었을 텐데, <리틀 포레스트>는 그만큼 욕심을 덜고 그 대신에 자연과 음식과 우정을 잘 버무렸다.
위의 영화 스틸컷이 단적인 예다. 남녀, 밤, 물... 참으로 진부하고 완벽한 설정들 속에서 만약 남주 여주가 어설프게 물속에, 감정에 빠져들었더라면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할 수 없었으리라 단언한다. 뭐랄까- 그러지 않아줘서 감독에게, 주인공들에 고마웠다고나 할까.
영화를 보기 전까지도 몰랐는데, 이 영화의 일본 원작은 '요리' 만화다. 아직 보지 않아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심야 식당'이나 '고독한 미식가'로 대표되는 일본의 음식 드라마들이 충분히 떠오를 만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느끼기에 <리틀 포레스트>는 요리를 소재로 한 원작을 다뤘다는 점에서 분명한 매력을 갖는 동시에 한계 또한 지니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속 요리들을 보며 나는 자꾸 '일본 원작은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일본의 작품, 문화와 견주어 보게 됐던 것이다. 아무리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원작이 있다'는 태생적인 한계를 어찌할 수 없는 건 감독의 해결 과제였던 동시에 자신감의 발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잘 살릴 자신이 없었다면, 일본과는 다르게 그려낼 의지가 없었다면 굳이 일본 원작을 차용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런 생각들로 영화 감상의 초반에는 머릿속이 조금 어수선해서였을까, 충분히 몰입하기 전에 그래서 나는 작품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일종의 '어색함'도 느꼈다는 게 또한 솔직한 평이다. 아무리 상황과 장소가 바뀌었다고 한들,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편의점 도시락을 먹던 주인공이 해내는 요리라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전통 음식들이 차례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스토리는 시간이 흐르며 나오는 '엄마'의 존재와 혜원의 기억을 통해 차츰 관객의 마음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리틀 포레스트>에는 주인공이 요리를 만들고 또 먹는 장면이 꽤나 자주 등장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극중 인물의 행위, 더 넓게는 사연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특정 소재를 설명하거나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요리' 하면 얼핏 떠오를 수 있는 한국 영화 <식객>과 <리틀 포레스트>가 분명한 차이를 갖는 지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세 인물들의 배경 이야기를 통해 관객 각자의 시선을 유도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주인공 혜원의 상황과 심리는 영화 전반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우른다.
2월 말에 개봉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예고편에서든 포스터에서든 내세우고 있는 '괜찮아'라는 문구는 거짓이 아니다.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든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저마다 적어도 '괜찮을 수 있겠다'라는 위안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괜찮구나'라고 읊조린 편이었다.
처음이었든 재수였든, 영화에서 주인공 혜원은 임용 고시에 한 차례 실패한 흔한 젊은이다. 시험을 함께 준비하던 남자 친구는 합격을 하고 관계가 멀어진다는 설정도 주위에서 찾아보기 쉬운 경우임은 물론이다.(이런 내용은 이미 영화 홍보에서 강조하고 있으므로 감상에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요) 그런 주인공이 고향에서 자연을 벗 삼아 요리와 농사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야말로 영화가 극적인 사건이나 변화를 통해 관객에게 소리치는 게 아니라 그저 담담히 보여주는 메시지라는 점에서 나는 정말로 편안하게 <리틀 포레스트>를 감상할 수 있었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 이는 비단 고향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못한 서울 토박이라 할지라도 공감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사실이다. 삼대가 내리 서울생활만 한 게 아니라면 한국 사람의 정서에는 설날이나 추석에 갈 만한 전원의 풍경이 누구에게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혜원의 고향집은 깔끔한 인테리어나 널찍한 구조와 같은 다소 '영화적인' 설정을 감안하더라도 충분히 편안하고 아늑한 안식처로써 제 역할을 다해냈다.
종합하자면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취직을 위한 상경, 이와는 반대로 구직(혹은 퇴직) 후의 귀향이라는 상황을 겪은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공 또는 주인공의 친구들에게 감정을 이입해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영화다. 반드시 귀향이나 상경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삶의 터전의 변화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영화의 공감 폭은 충분히 넓다.
인물들의 행동을 영화와 다르게 가정해 본다면 이 작품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실패 후 오직 성공을 위해 서울에 남아 분투하는 주인공이었다면, 어떻게든 시골을 벗어나고 싶어 주인공을 떠나는 친구였다면 제 아무리 영화 내용이 흥미진진했더라도 관객은 편안하게 감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영화에는 귀여운 강아지(오구)도 한 마리 나온다. 연관 기사를 찾아보니, 감독은 원작에서의 고양이를 한국적으로 각색하는 동시에 외딴 시골집에서의 불안함을 없애고자 주인공을 지켜주는 강아지를 등장시켰다고 한다. 어찌 보면 굉장히 익숙한 설정이지만 진부하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를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오구가 나오는 내용이나 장면들에 과함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이처럼 '과하지 않아서' 좋았던 게 역시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지나치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담담하게 풀어낸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무척 친근하면서도 유머러스했고, 그 결과 나는 영화가 끝날 때 "벌써 끝났네"라고 내뱉으며 아쉬워했다. 혜원과 은숙과 재하를 더 볼 수 없어서 섭섭했다고나 할까.
뚜렷한 결말이나 완성을 보지 않고 영화관을 기분좋게 나설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리틀 포레스트>의 여운은 특별했다. 이를테면 노래방에서 마지막 곡으로 온갖 것들이 섞인 리믹스라든지 길고 긴 노래를 부른 게 아니라 그냥 평소에 좋아하던 곡을 마음을 다해 열창한 느낌이랄까. 작물을 더 이상 옮겨심지 않고 '아주심기'함으로써 완전히 뿌리를 박고 자라게 한다는 설명과, 약간의 열린 결말로 끝난 영화가 꼭 그런 느낌이었다.
<리틀 포레스트>는 그렇게 아주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아주 깊이 기억에 남아 내 마음속 아주심기에 성공한 영화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