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패스 두 번째, 유쾌한 케이퍼 무비 <로건 럭키>
★★★
언제부터인가 한국 영화에서도 *케이퍼 무비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중에서는 <도둑들>처럼 전형적인 장르물로서 흥행을 거둔 사례도 있고, <타짜>같이 약간은 다른 방식으로 한국 영화만의 색채를 입혀 성공을 거둔 케이스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기억을 더듬어 보면 <범죄의 재구성>을 처음 봤을 때 '어, 우리나라에도 이런 영화가?' 라며 감탄을 한 이후로 이와 비슷한 장르에 대한 호감이 꾸준히 상승했던 것 같다. (기대가 컸던 걸까, 근래 봤던 '꾼'의 경우 상당한 실망을 했지만)
하지만 누가 뭐래도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션스 일레븐>을 처음 봤을 때의 재미와 신선함을 뛰어 넘기는 힘들 것이다. 헐리웃의 엄청난 자본과 철저한 각본, 기획뿐만 아니라 초호화 캐스팅이 더해져 다시없을 명작으로 회자되는 케이퍼 무비의 대명사인만큼 이에 대해서는 내가 더 논할 필요도 없겠다.
그래서 이 영화, <로건 럭키>는 일단 감독만 믿고 봐도 좋은 영화임에 분명하다.
* 하이스트 필름(Heist film) 또는 케이퍼 무비(Caper movie)는 범죄 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로, 무언가를 강탈 또는 절도 행위를 하는 모습과 과정을 상세히 보여주는 영화를 뜻한다. (출처 : 위키백과)
영화의 출발은 역시 주인공인 지미 로건(채닝 테이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그는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광부로,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로 인해 다니던 공사 현장에서 해고당하고 만다. 고교 시절 잘 나가던 풋볼 선수였던 그의 이력은 주위 사람들의 짤막한 얘기만으로 관객에게 전해질뿐이다. 낙심한 그가 이혼한 전처의 집에서 딸아이를 만나는 상황에서는 부성애보다 아이의 새아버지가 지닌 부유함으로 인해 상대적인 빈곤함만 부각될 정도로, 지미는 소위 '하층 계급'의 전형적인 인물로 보인다.
배역의 성격이 상당히 달라서였는지, 웬만해서는 알아차렸을 법도 한데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그가 <킹스맨 : 골든 서클>의 에이젼트 데킬라였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건 사족.
초반부 영화의 전개 속도는 비교적 빠르다. 지미가 바에 들러 술 한 잔을 기울일 때 집안에 내려져 오는 '로건 징크스'에 대해 하소연하며 처지를 한탄하는 건 다름 아닌 그의 동생 클라이드 로건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한쪽 팔, 아니 정확히는 손이 없다. 국가를 위해 두 차례나 파병에 나섰다가 사고로 잃은 그의 손에는 의수가 끼워져 있다. 이러한 형제의 고른 결핍(?)을 조롱하는 유명 레이서(스폰서)와 벌어지는 짧은 에피소드에서, 행동이 앞서는 형 지미와 이를 무표정한 얼굴로 돕는 클라이드가 보이는 형제애야말로 이후의 영화를 관통하는 어떤 상징과도 같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클라이드 역의 배우 아담 드라이버는 내가 마침 최근에 본 영화 <패터슨>을 통해 워낙 인상 깊었기 때문에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잔잔한 감성 영화 <패터슨>에서의 무표정과, 오락 영화 <로건 럭키>에서의 무표정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해 보는 것도 꽤나 재밌는 일이라는 건 사족이 아닌 팁이랄까.
지미는 그가 일했던 현장의 정보를 토대로 '한 탕'을 계획하고 동생을 합류시킨다. 여기에는 어떤 거창한 목적이라든지 준비 과정 따위는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지점이야말로 <오션스 일레븐>이나 <이탈리안 잡>과 같은 전형적인 케이퍼 무비와의 차별점이 아닐까 한다. '적당할 때 그만둘 것'을 최종 계명으로 삼고 다소 허술하게 벌이는 두 형제의 범죄 시도에는 각종 첨단 장비와 기술자들이 등장하는 여타의 범죄물과는 다른 친근함이 있는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도 계획의 실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폭발물 제작에 필요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 뱅(다니엘 크레이그)이다. 감옥에서 죄수복을 입고도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는 이미 007의 젠틀함이나 엘리트 이미지는 온데간데없다. 그러나 이 범죄자에게서 느껴지는 악당의 진지함조차 로건 형제의 느슨함 앞에서는 위력을 잃고 만다. 천진난만하다 싶을 정도로 탈옥과 강도를 쉽게 얘기하는 그들의 계획에는 비록 철저함은 없을지언정 조 뱅을 혹하게 할 만한 설득력이 충분하다.
조 뱅이 일종의 '보험'으로 그의 두 사촌 동생들을 합류시키며 범죄단의 구성은 금세 끝이 난다. 전형적으로 '얼빵한' 뱅 형제들은 그러나 무조건 로건 형제의 계획에 합류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나쁜 짓을 위한 '명분'이 필요했고, 이는 로건들이 그랬듯이 결코 거창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이 지점에서 또한 나는 감독의 의중을 약간은 헤아릴 수 있었다. 범죄는 물론 사회악이지만 우리 주위에서 종종 자행되는 일들이고, 이를 결코 무겁지 않고 오히려 재밌는 오락 영화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확실한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대개의 케이퍼 무비들은 그러한 명분으로 가족의 복수라든지 권력자에 대항하는 의적 활동 등을 택하지만, <로건 럭키>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한 느슨하고도 개성적인 영화다.
이후의 전개는 보통의 케이퍼 무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상 최대의 레이싱 대회의 지하에 있는 금고는 생각보다 허술한 관리 하에 있고, 덕분에 많지 않은 인원으로도 로건 형제는 범죄를 실행에 옮겨 나갈 수 있다. 당연히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 몇 차례의 위기와 갈등도 겪지만 <로건 럭키>에서 범죄 현장은 비교적 단순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위에서 소개한 인물들은 전문 인력(?)도 아닐뿐더러 전체적인 계획도 애초에 느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에서 관객들은 더욱 친숙함을 느끼며 이따금 터져 나오는 코믹한 장면들에 편하게 웃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명작'이라고는 평가하지 않는다. 시사회 감상 후에 입에 발린 소리만을 늘어놓지는 않기 위해 '짐짓 평론가인 척' 하고 덧붙여 보자면, 영화의 신선함이나 시나리오의 완성도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 아쉬움은 감독의 전작 덕분에 커져버린 기대의 영향일 수도 있고, 내 평가가 일정 부분 맞다면 스토리의 촘촘함이 다소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물론 내가 이 영화에서 차별 포인트로 읽어낸 게 다름 아닌 '느슨함'이라고는 해도, 그러한 느슨함을 표현하고 끌어가기 위해 조금 더 치밀한 플롯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의구심이 남는다.
영화의 중간중간에는 지미의 딸 새디가 등장한다. 극 중 그녀는 일관되게 지역 어린이 장기자랑 대회(?)에 나갈 팝송을 준비하고, 치장에 공을 들인다. 이는 어른들이 만들어 낸 상업과 자본에 매료된 백인 여자 아이의 전형과도 같다. 그랬던 그녀가 결국에는 아빠(지미)의 애창곡인 컨츄리송을 부르며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는 장면에서는 감동적인 연출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미 나와있는 많은 리뷰들이 지적하듯 이 영화에서 로건 형제의 범죄가, 새디의 노래가 미국의 자본 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비틀기인 건지 난 잘은 모르겠다. 다만 내 귀에도 익숙한 컨츄리 송이 울려 퍼질 때의 느낌이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향수일 거라는 건 확실히 느꼈다. 이 또한 다소 느슨한 영화인 <로건 럭키>가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이유이며, 북미 개봉 이후 영화가 호평을 받은 원동력의 하나일지도.
로건 형제의 이야기는 징크스에서 출발했으나 그 끝은 럭키로 막을 내릴 수 있을지, <로건 럭키>는 느슨하고 편안한 코미디로 관객들에게 그 전말을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