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봄비처럼, 영화는 장맛비처럼.

무비패스 세 번째, 이 얼마만의 순수한 멜로인가

by 차돌


★★☆


봄비가 잦아지고 있는 요즈음, 관객들이 봄비의 설렘을 가득 안고 영화관으로 갈 수 있는 멜로 영화가 모처럼 개봉했다.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이지만, 배우 손예진과 소지섭이 주연이라는 사실만으로 새로운 기대를 주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봄비와 함께 관객들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 시작한 이후 화면에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살랑살랑 봄비가 아닌 굵은 장맛비다. 학창 시절의 첫사랑뿐만 아니라 부부의 인연, 아이에 대한 사랑 모두를 아우르는 내용에 풋풋함을 뛰어넘은 진지함의 무게가 깃들어서일까.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그래서 봄비처럼 마음을 살짝 적시다가는 이내 장맛비처럼 온몸을 흠뻑 젖게 만드는 그런 영화다.




1. 여주인공, 손. 예. 진.


movie_image (2).jpg
movie_image (8).jpg


국내 영화계에서도 독보적으로 청순한 이미지를 지닌 손예진이다. 그런 그녀가 포스터에 화사하게 등장하고 있는 이 영화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손예진의 영화임에 분명하다. 물론 '소간지'로 통하는 소지섭의 무게감도 상당하긴 하지만, 일본 원작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다케우치 유코의 순수한 얼굴이 강렬했듯 멜로 영화에서 여배우의 이미지란 그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할 수밖에 없다.


한국판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그래서 손예진과 다케우치 유코 두 배우의 차이만으로도 차별성을 짚어볼 수 있는, 소위 '여주(인공)'에 의한 영화가 분명하다. 결이 다른 청순함이랄까, 손예진은 역시 손예진다운 모습으로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일본 정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도록 해 주었다는 생각이다.


movie_image(9).jpg


청순하다고 해서 반드시 순종적이라거나 여리여리한 성격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극 중 수아(손예진)는 잘 보여준다. 배우 손예진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에 의해서든, 일본 원작과의 차별성을 위해 스토리 곳곳에 심어놓은 설정들 덕분이든 영화에서 수아가 보여주는 모습은 때때로 강렬하고 도발적이기까지 한 것이다.


전교에서 손꼽히는 모범생이었던 수아가 자신의 모든 것에 우선하여 사랑하는 연인이자 남편 우진(소지섭)과 어린 아들을 선택하는 영화의 큰 줄거리는, 그만큼 수아의 사랑을 돋보이게 해 준 반면 일본 원작의 흐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는 리메이크작의 한계 또한 어쩔 수 없이 드러낸다고 여겨진다. 아이러니하다고 볼 것 까지야 없겠지만 이러한 여주인공의 정체성은 '주체적인' 한국 여성 캐릭터로서 '순종적인' 일본 여성의 순애보를 따라야 하는, 10년도 더 지난 과거 작품의 오마주이자 재해석으로 이해된다.




2. 납뜩이와 홍구


movie_image (10).jpg


우진의 절친 홍구(고창석)의 유쾌함이야말로 원작의 줄거리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의 한국형 '코믹'멜로를 완성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각종 히어로물과 블록버스터가 즐비한 요즘의 영화 시장에서, 제작자나 감독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흥행한 멜로 원작을 리메이크한들 순수하기만 한 멜로 영화를 내세우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따르지 않았을까.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홍구의 모습에서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조정석)가 떠오른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주인공의 친구가 톡톡한 감초 역할을 해내야 했던 이유는 코믹함의 가미뿐만 아니라 원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벽한' 남자 주인공 우진을 끌어내리기 위한(?) 설정을 위해서가 아닐까 한다.


일본 원작의 남자 주인공이 어수룩한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순수함을 어필할 수 있던 반면 한국판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우진(소지섭)은 제 아무리 옷의 단추를 못 꿴다 해도 너무 잘 생기고 샤프해서 도저히 모자라게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영화를 보며 내 옆의 여자 친구는 소지섭의 넓은 어깨에 감탄하느라 자신의 감상뿐만 아니라 못난 남자 친구의 감상까지 방해했던 것이다.


그런 우진에게 연애 코치며 잔소리까지 담당하는 홍구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이 불가피한 설정이자 부가적인 재미로 관객들에게 의외의 웃음을 선사하는 영화가 바로 한국판 <지금 만나러 갑니다>이다.




3. 비의 시간과, 그들의 공간


movie_image (3).jpg


장마, 비.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다른 무엇보다 '날씨'를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서정적인 멜로 영화이다. 장마의 계절은 다시 돌아온 수아가 머물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한 동시에, 비 오는 날은 그러한 기간 내에서도 우진과의 과거, 현재의 특정 데이트를 돋보이게 해주는 훌륭한 배경이다.


현재, 과거. 이 영화는 기억을 잃은 수아와 그런 그녀를 어느 때보다 소중히 대하는 우진의 '현재형' 로맨스와,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 이들의 '과거형' 로맨스가 교차하는 판타지 멜로 영화이기도 하다. 결코 복잡하지는 않게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스토리는 그래서 일직선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난 구조적인 재미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movie_image (1).jpg


이처럼 비와 시간이라는 요소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멜랑꼴리한 분위기를 극대화하면서도 앞서 언급한 코믹한 요소들과의 조화를 유지한 채 주인공들의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이어 나간다. 이는 영화에서 시간의 변주는 있을지언정 시골 마을이라는 작품의 배경으로 공간의 연속성을 지켜낸 덕분이기도 하다. 그 옛날 작은 학교에서 서로의 첫사랑이었던 우진과 수아는 어디 먼 곳에서 재회하거나 훌쩍 떠나지 않고도 추억이 깃든 장소에서 사랑을 이어가는 것이다.


movie_image (11).jpg
movie_image (12).jpg
일본 원작의 시간의 터널(좌) / 한국 영화 우진과 수아의 집(우)


몽환적인 분위기로 유명했던 일본 원작의 '터널'은 그러나 한국판에서는 개인적으로 다소 아쉽다. 수아가 다시 등장하는 장소이자 떠나기도 하는 중요한 배경 치고는 너무 어둡고, 심지어 음울하기까지 한 기찻길 터널을 택한 건 왜였을까. 영화 공식 스틸컷에도 이 공간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작품의 완성 후에 과감하게 뒤로 감춘 것인지, 애초부터 다소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두고 싶었던 것일지.


대신에 수아와 우진의 집은 일본의 서정적인 감성 그대로가 살아있는 듯한 공간이다. 이를 보고 '우리 시골 마을에, 그것도 아빠와 아들 둘만 사는 집이?'라고 잠시 생각했던 건 내가 영화에 지나치게 가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작고 예쁜 집에서 느낀 감상도 이와 비슷했으니, 일본 원작 또한 현실의 미화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영화적 공간의 순수성은 그 자체만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좀 더 가져야 감상에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겨진다.




4. 30대 남성에게, 멜로란


movie_image (6).jpg


그렇게 정해져 있어


영화 중반에는 수아의 단호함에서 비롯된 줄 알았던 이 대사야말로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래야만 했던' 필연임을 관객들은 깨달을 수 있다. 원작을 본 관객이라면 크게 놀랍지 않은 대사일 수는 있다만, 원작을 완전히 잊고 새롭게 봤던 나로서는 나름대로 수아의 이 대사를 통해서 어떤 '감상의 전환'을 맞이했다.


movie_image.jpg


솔직히, 나는 영화의 초반에 나 자신의 어쩔 수 없는 남성성과 나이 들었음을 자각했다는 고백이다. 옆에서 훌쩍이는 여자 친구를 보며, 앞에서 서로에게 바짝 기대어 영화를 보고 있는 어린 커플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들과 달리 멜로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것이다. 30대 남성이 지닌 감수성의 한계라고 하면 변명일까. 그러고 보니 고등학생 무렵부터 일본 영화에, 히로스에 료코에 열광하던 일부 친구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성향의 차이도 무시는 못할 것 같다만.


하지만 이런 나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작품에 몰입해 그 옛날의 감성을 되살려 봤다는 건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원작과 장르의 한계를 극복하고 관객에게 새로 어필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다. 요새 좀처럼 영화관에서 멜로 영화를 보지 않던 내가 우진의 주머니 속으로 수줍게 손을 넣는 수아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연출의 성공 덕분인 것이다.


한 사람만을 오래도록 좋아하고, 그 혹은 그녀와의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일이 어느새 동화 속 이야기인 현실에서 순수 멜로 영화는 그래서 더욱 '영화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작품의 완결성 내에서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아름다운 영상미를 관객들에게 제공하는 일이야말로 영화의 힘이 아닐는지.




1.jpg


한국 영화에 대한 리뷰인 만큼 최대한 일본 원작에 대한 언급은 삼가려 했건만, 글을 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옛날의 명작이 떠오르는 건 순수했던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이리라.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어린 학생들에게나 혹은 막 사랑을 시작한 풋풋한 연인들에게는 이 영화가 어떻게 다가갈지 나는 더 이상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만나러 갑니다> 가 일본의 <いま、会いにゆきます> 의 쉼표와는 달리 보다 직선적이고 선이 굵은 한국형 멜로 영화라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논할 수 있을 것 같다. 봄비처럼 반갑게 찾아와서 장마처럼 진하게 이어지는 이 영화, 원작을 봤든 안 봤든 오랜만에 순수한 사랑을 돌아보게 해 준 멜로였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느슨하게 살았다고 럭키하지 말란 법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