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했던 첫 실습, 해외에서 살아남기 IN SWEDEN
돈까스를 엄청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가끔은 한번씩 예전에 어릴 때 먹던 분식집 돈까스가 땡긴다.
대기업 스프맛과 짭잘달달한 소스, 얇은 튀김...
여기선 내가 만들어 먹거나 슈니첼이라는 독일식 돈까스를 사다가 먹기도 하는데
이번엔 부지런을 떨어서 만들어 둔 홈메이드 냉동 돈까스를 다시 꺼내서 튀겨 먹었다.
어느 덧 나도 국물을 자꾸만 찾게 되는 어른이 되었나보다.
뭔가 허전해서 급 미소국도 끓였다.
가장 간편하게 바로 끓일 수 있는 국이다.
후라이팬에 기름을 낭낭하게 두르고 튀겼는데
냉동에서 해동이 좀 덜 되서 그런지 안까지 익지 않아서
결국엔 오븐까지 가동해서 속까지 익혔다.
냉동으로 만드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
소스를 듬뿍듬뿍 먹는 사람이라 소스 맛으로 먹는다.
역시 시판소스는 실패가 없다.
나는 추억과 함께 먹고
우리 남편은 그냥 하나의 한국음식이네 생각하면서 먹었겠지?
스톡홀름에서 내가 알기로 가장 큰 아시안마트,
여기엔 한국 식료품도 꽤 많아서
그리고 위치가 정말 접근하기 좋은 지하철역 바로 옆이라
지하철역에 들리면 참새가 방앗간 지나치지 못하듯 들린다.
예전부터 이 떡볶이 키트를 본 적은 있었는데
가격이 좀 부담스러워서 안사다가
궁금한 마음에,
내가 나를 보상해주고 싶은 심리가 발동해서
덜컥 사버렸다.
115크로나, 약 1만 5천원이다.
집에 가자마자 뜯어서 해먹었는데
안에 고래사어묵이 들어있다?
바로 신뢰 급 상승!
고래사어묵은 부산에서도 나름 비싼어묵인데 이걸 쓰다니...
떡볶이엔 김밥이지!
배고파도 나름 구색은 갖춰서 같이 먹었다.
이 떡볶이 맛있다!
가격만 착하면 자주 먹을 거 같은데 가격이 좀 착하지 못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찾을 거 같다.
이 날 남편은 치과치료로 같이 못 먹었는데
다음에 남편한테 맛보여 준다는 핑계로 한번 더 사서 먹어야 겠다.
우리남편표 찜닭
그리고 내가 만들어 둔 무생채
스페인 한인슈퍼에서 유통기한임박이던 납작당면을 사와서
열심히 찜닭을 해먹으며 소비중이다.
건면이라 유통기한이 좀 지나도 상관없을 거 같긴하지만
덕분에 납작당면이 든, 여기선 사치스런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다.
학교가는 길, 이른 아침
동이 트기 전이라 하늘이 진짜 미쳤다... 너무 아름다웠다!
1월 말, 스웨덴은 어둠과 싸워야 하는 곳이 된다.
조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12월 동지가 지나고나선 낮이 길어지는 중이니까
그것에 위안을 삼으며 사람들은 버틴다.
평생을 여기서 산 사람들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많이 힘들어하고
무던한 사람들은 무던하고 그런가보다.
나는 고작 3년을 산 사람이라 아직은 무던하지 못하다...
그래도 아침 일찍 등교하는 길에 이런 하늘은 위안이 되고, 선물이 된다.
내려서 학교까지 걷는데 나만 하늘에 감동한 건 아닌가보다.
사람들도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고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다.
하늘 핑계로 학교가는 길 발걸음이 늦춰지던 날.
스웨덴 맥도날드엔 맥모닝메뉴가 없다.
한국과는 많이 많이 다른 메뉴 구성...
결론적으론 별로 먹을 만한 게 없다.
한국에서도 맥도날드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자주 찾진 않았지만
대학교 때나 직장을 다닐 땐 아침 이른 시간 맥모닝은 좀 먹기도 했다.
그 시간에 연 곳이 많지도 않아서 그런 것도 있고
나름 그 조합과 커피가 나쁘지 않았던 거 같다.
괜히 없으면 더 그립고 먹고 싶고 그렇다, 사람 마음이...
스웨덴의 가장 큰 커피체인인 에스프레소하우스에서 새롭게 나온 샌드위치라고.
꼭 맥모닝 같아 보여서 사봤다.
가격은 맥모닝과는 많이 다른...
47크로나, 약 6천 1백원.
사이즈는 맥모닝과 거의 같고
빵이 좀 더 건강(?)해보인다는 것
베이컨, 치즈, 달걀후라이 조합은 나쁘지 않을 수 없다!
따뜻할 때 앙! 베어 먹었다.
스웨덴도 코로나이후 경기가 많이 좋지 못했다.
특히 작년은 뭐...
화폐가치가 내가 생전보지 못했던 숫자로 떨어졌고
집값도 떨어지고 대출이자는 계속 오르고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회사들은 몸집을 줄였다.
물가도 많이 올랐다...
암튼, 한국도 기사나 친구들에 말에 의하면 힘들다고 하던데
내가 느끼기에 코로나이후 경제가 살아난 곳은 없는 거 같다...
다들 힘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거 같다.
암튼, 우리도 그렇게 우리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데
한번씩 경제불황으로 이렇게 문 닫는다는 안내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요즘엔 보기 드문 손글씨 안내문... 에휴
해외살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합
라면과 김치
내가 만든 겉절이식 김치
김치를 만들게 되면 자꾸만 라면이 연동이 된다.
밀가루를 뒤집어 쓴 나
화장실에서 잠깐 내 모습을 남겨놨다.
이때 아님 짬도 없는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 현장이다.
학교를 다니고
3개월만에 첫 실습을 나왔다.
할말이 참 많은 나의 학교, 그리고 실습생활들...
몇몇 친구들에게만 털어놓기도 했는데
(물론 우리 남편은 실시간으로 매일 듣지만;;;)
첫 실습지를 구하고 4주간의 실습이 시작되었다.
실습지를 구하는 거부터가 고난이었다.
나를 써달라는, 그리고 사인해 달라는 종이 한장 덜렁들고
내가 실습지를 찾아가서 구해와야 한다.
정해진 실습지없이 그냥 맨땅에 헤딩...ㅠㅠ
언어적으로 많이 부족한 외국인인 내가 이 과정을 겪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구해진 고마운 실습지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9시간 가까이(조금 일찍 출근하기도 하고 중간 점심시간이 끼어있기도 하고...)
어쩔 땐 중간에 앉지도 못한 채 하루종일 서서 일하고(당연히 빵 만드는 공간엔 의자나 앉을 공간이 없다!)
하루종일 밀가루를 뒤집어 쓰고 일하니 입맛도 많이 없다.
좋아하는 빵이었는데... 그걸 지금 만들려고 이런 과정을 겪는데
나의 로망과 현실은 역시나 괴리가 컸다.
열정페이로 돈 한푼 안받고 일하지만,
그들의 노하우나 일하는 속도, 과정을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 배운다는 건 좋았지만,
체력적으로 많이 고된 4주간의 실습이었다.
한 제품의 한 과정이 끝나면 다른 제품으로 넘어가고 그 사이 잠깐
오븐에서 갓 나온 빵 하나 받아서 한입 먹었다.
이 때 한입이 마지막 입이 되었고
남은 빵은 휴지에 고이 싸서 그냥 집으로 들고 왔다...하하
출근길에 만난 토끼
이때만 해도 난 봄이 오는 줄 알았다.
새벽 출근길이라 많이 어둡고 추웠지만
토끼는 봄의 상징이니까!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2월 내내 실습을 했는데
2월 중순까진 정말 차디찬 겨울이었다...
출근길도 힘들고 현장도 어렵고 정말 체력이 말도 못하게 바닥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쓰러져 자고 씻는 것조차도 너무 버거웠다.
그렇게 4주를 버텼고
마지막날은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그냥 끝나가는 게 시원할 줄만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같이 일했던 분들이 고마웠다는 인사와 함께
케잌이며 이 곳에서 파는 제품들이며
오늘 작업했던 빵이며 바리바리 챙겨줬다.
평소에 워낙 엄격하게 나를 관리했던 분도 그 순간엔 뭔가 다르게 느껴졌고
나에게 관심도 없이 그냥 일만하시던 분들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이라니까 다들 뭔가 이제서야 나한테
고마웠다고 말해주는 게 감동이었다.
나는 나대로 외국인이지만 태도하나는 성실하게 보이고 싶어서
아침 출근부터 퇴근까지 찡그리지 않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실력은 그들에 비해서 한참 바닥이고 너무나도 느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고자, 나 열심히 하고 있다 보여주고 싶었다.
말은 안했지만 알고 있었나보다...
더 감정이 차오르기 전에
나도 고맙다는 말만 되뇌이며 문을 닫고 나왔다.
카페 직원이 '또 보자'인사하는 데
나 오늘이 마지막이에요라고 말하니
나를 꼭 안아준다ㅠㅠ 고마웠어요!
3월로 접어드니 퇴근길은 좀 밝았다...
그리고 남편과 통화하며 집으로 가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엉엉 우는 게 아닌,
그냥 서러움과 마지막날의 그 따뜻함에 북받친 눈물이었나보다.
집에 와서 남편에게 이렇게 받아왔다고 자랑하고
항상 만드는 거만 지켜보던 케이크였는데
이걸 내가 받게 될 줄이야!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인지 알기에 더 고맙게 느꼈다.
재고가 남아서 주는 건지 아님 진짜 나를 위해 남겨 놓은 건지 모르지만
그냥 전자든 후자든 고마웠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생각보다 작업량이 많은 곳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었다.
단순한 빵집, 카페를 넘어 여기저기 스톡홀름 전역을 납품하느라
항상 쉴 새 없이 바쁘게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대부분 E 성향이 밝고 말도 많고 시끌벅적한 곳이었고
나와 같은 I들은 드물었다.
그 중 나는 외국인에 말도 잘 못하는... 완전 새내기 인턴;;
한명한명 기억하고 나중에 혹시나 다시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고맙게도 나를 하나하나 가르쳐준 사람들도
차가웠지만 나를 일깨워 준 사람들도
모든 것에 처음은 어렵지만
내가 해외에 나와서 살면서, 새로운 과정을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4주가 아니였나 싶다.
학교를 시작하고 처음 4주가 정말정말 힘들었는데
첫 실습 4주는 그에 못지 않게 나를 힘들게 했던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틴 나에게 고맙고,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생길 진 몰라도 이 경험치가 좋은 자양분이 될 거 같다.